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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w Lion Nov 08. 2023

길에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한다

그럼, 그 존재 그대로 충분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나가는 타인에게 크게 관심이 없다. 어쩌다가 눈이 마주쳐도 "Bonjour." 하고 인사를 건네고 다시 각자의 갈 길을 갈 뿐이다.


아마도 그 짧은 인사는 낯선 이에게 보내는 최대의 친절일 것이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날씨가 정말 좋네요." "어머나. 이 시멘트 틈에 이름 모를 꽃을 보세요. 너무 대단하지 않아요?" "와! 강아지가 너무 예뻐요. 이름이 뭐예요?" "얼굴이 낯이 익은데, 이 동네에 사세요?" 가끔은 이렇게 하고픈 말들이 입 안 가득 맴돌지만, 나 역시 그저 말없이 낯선 이들을 스치고 지날 뿐이다.


그러나 가끔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내게 먼저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그저 멀리서 지긋이 나를 바라보기도 하고, 때로는 가까이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길을 걷다 보면 자주 마주치는 작고 소중한 존재들, 꼬리를 힘껏 하늘로 들고 사뿐사뿐 홀로 조용히 길을 거니는 그들은 바로 고양이이다.



파란 대문집 검은 고양이. 달밤에 남편과 산책을 하던 어느 날, 우리는 집 앞 작은 골목길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나지막한 담벼락에 홀로 앉아있다가 지나가던 나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고 그렇게 서로를 한참 동안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어느샌가 담벼락에서 훌쩍 내려와 내 앞에서 온몸을 뒤집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고 가로등 불빛이 은은히 빛나던 작은 골목길에서 우린 그렇게 처음으로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반갑게 나를 반기는 누군가가 너무나 그리웠던 시절, 이방인이던 나에게 거침없이 다가와 인사를 건네준 이 작은 검은 고양이는 프랑스에서 나에게 가장 먼저 다가와 준 첫 번째 이웃이었다.


움직임을 멈추고 깊은 시선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눈빛 그리고 경계심 없이 가까이 다가와 건네준 보드라운 인사는 낯선 땅에서 외롭던 내게 참으로 따스한 위로였다.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왜 프랑스에 왔는지, 프랑스어를 잘하는지 묻지 않아도 달빛 아래 마주한 서로가 존재 그대로 충분한 것이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던 시간. 담벼락 위에 홀로 앉아 있던 그의 시선에 낯선 내가 살며시 들어선다. 다행히도 그는 크게 놀라지 않고 생전 처음 보는 나를 가만히 응시한다.


그렇게 저녁 산책길에서 우연히 마주한 우리는 선선한 저녁바람이 드나들도록 일정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조용히 바라본다. 어쩌면 이렇듯 수선스럽지 않은 낮은 고요와 침묵은 허공에 가볍게 흩어지는 말보다 훨씬 더 묵직하고 따스할지도 모른다. 이렇듯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시원한 바람이 지나가는 길 한 뼘 정도는 꼭 필요할 것이다.



불어오는 저녁 바람에 나뭇잎들도 너푼거리며 춤을 추듯 인사를 건넨다. 해와 달이 교차하는 시간, 동네 어느 집에서인가 준비하는 저녁 식사 내음이 솔솔바람을 타고 정겹게 불어오고 바람 따라 속삭이는 나지막한 대화 소리와 거실에 틀어놓았을 티브이 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모든 이들이 고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시간, 혹시라도 어딘가 홀로 조용히 앉아있는 그들과 눈이 마주친다면 지친 발걸음 잠시라도 멈추어 서 주기를. 그럼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따스한 눈빛으로 인사를 건넬 것이다.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발걸음을 재촉하던 날, 큰 도로 옆으로 난 작은 길 모퉁이에서 우리는 우연히 마주했다. 그는 아마 담벼락에 탐스럽게 핀 꽃 밑에 앉아, 지나는 사람들을 한가로이 구경하고 있었을 것이다.


서로의 존재를 인식한 후, 거리를 두고 조심스레 인사를 건네니 기다렸다는 듯 검은 꼬리 살랑살랑 흔들며 달려와 머리를 비비며 인사를 전한다. 그러자 저 멀리 색색의 수국과 시멘트 틈에 자란 이름 모를 풀들도 바람에 흔들리며 함께 인사를 건넨다.


작은 골목길 모퉁이, 고양이의 작은 시선을 그냥 지나쳤다면 눈에 담지 못했을 풍경이다. 이렇게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면 작고 소중한 수많은 존재들이 그 자리에서 이토록 다정하고 따뜻하게 인사를 건넨다. 이 작은 고양이처럼 거리를 스쳐가는 낯선 이들에게 다정한 눈인사를 건네면 그래도 따뜻한 누군가 한 명쯤은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내게로 다가와주지 않을까.



집에 가는 길, 우연히 고개를 들었다가 만난 창가의 검은 고양이. 어쩌면 그는 보름달처럼 둥글고 노란 눈을 반짝이며 저녁이면 집에 돌아올 가족을 기다리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같은 창문에서 늘 마주하는 풍경이 그에게는 매일 새로울지도 모른다. 고양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권태로움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시선이 느껴져 주위를 둘러보니 주차장 담벼락에서 귀여운 관찰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낯선 네가 조금 두렵지만 그래도 궁금은 해."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각자의 방식대로 서로를 마주한다.


담벼락 위로 빼꼼히 올라온 작은 얼굴과 앙증맞은 두 귀, 경계를 늦추지 않고 호기심 있는 모습으로 조심스레 낯선 이를 바라보는 이 작은 고양이에게서 어쩌면 겁이 많고 소심한 내 모습을 마주하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익숙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홀로 미지의 세계에 뚝 떨어진 후, 내가 사용하는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희한한 사람들만이 가득한 세상에서 홀로 가만히 몸을 숨기고 조심스레  낯선 이들을 바라보던 내 모습을.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익숙한 모든 것들도 언젠가 낯설던 처음의 순간이 있었음을. 그러니 지금은 서로의 거리가 이렇듯 조금 멀다 해도 두 번 마주하는 날에는 이 보다 조금 더 가까울 것이다.




고양이가 사람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은
꼭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좋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칼 뱅 베흐텐>



길에서 마주한 우리는 서로의 시선에 들어온 낯선 존재를 조용히 바라보고 탐색한다. 그러다 서로의 시선이 마음에 와닿으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심스레 다가가 따스하고 보드라운 인사를 건네며 기꺼이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그렇게 길에서 서로를 마주하면, 그럼 그 존재 그대로 그저 충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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