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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w Lion Mar 02. 2024

시절 인연

그토록 소중한 인연은 이생의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와 나는 에펠탑이 이렇게 빼꼼히 보이는 작은 호텔에 나란히 누워 밤 깊은 시간까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스르륵 잠이 들었다. 유부녀들의 달콤한 자유시간, 둘 다 한국을 떠나 콧대 높은 이 나라에 사는지라 긴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처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프랑스에 온 시기도 비슷하고 무려 동갑인 그녀는 이 먼 타국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이다.


그렇게 불 끄고 편하게 누워 수다 떨다 솔솔 잠이 들던 그때, 오래전 그와 처음으로 마주 앉아 단둘이 술잔을 기울이던 그날이 왜 그렇게 뜬금없이 떠올랐는지 모른다.




어스름 해가 지던 시간, 사무실이 있던 건물 앞 인조 연못가 풀숲에서 들리던 요란한 풀벌레 소리가 어렴풋이 기억에 남는 걸 보면 아마도 가을이었을 것이다. 그날은 오후에 급조된 회식이 예정되어 있던 날이다. 그러나 뒤늦게 합류하기로 했던 팀에 갑자기 급한 회의가 생기는 바람에 우린 본의 아니게 단둘이 회식이 아닌 회식을 하게 되었다.


깊어가는 가을밤, 손님도 별로 없는 조그만 술집에 놓인 허름한 테이블 위에 소주병은 한병 두병 하염없이 늘어가고 그는 결국 동이 터서 선술집이 문을 닫을 때까지 내게 정말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그가 살아온 생의 기나긴 대서사를 들으며 이상하게도 그 안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도 같다.


한참을 듣던 내가 왜 너의 지난 상처와 고통을 이렇게 다 얘기하는 건지 묻자 너는 "몰라요. 그냥 그러고 싶어서요."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듣고 뭔가 참 실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납득이 갔던지라 지금까지도 뚜렷하게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날 이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누구보다도 서로를 아끼고 응원하는 선후배이자 동료를 넘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서로의 삶 속에 그런 이의 등장은, 생의 전체를 우주 먼지처럼 홀로 부유하던 이들이 비로소 하나의 빛이 되어 반짝이는 별이 될 수 있도록 삶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영혼이 성장할 시기가 되면 반드시 만나야 할 어떤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그럼 의식이 자각하기도 전에 이미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다. 그날의 우리가 그러했듯이.




가끔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디 그런 소중한 인연이 내 인생에 또 없을까?


크게 의미 없는 걸 알면서도 이곳에서 소모적인 만남을 이어가 보기도 했다. 그러나 해외에 사는 한국인이라는 공통분모 하나 만으로는 몇 번이고 만난다 하여도 친구는커녕 아는 사람도 될 수 없는 이들, 몇 번을 만나도 절대로 서로의 본질을 알 수 없는 이들, 내면이 아닌 표면만을 바라보는 이들, 그런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만나 시간만 때우며 그저 공중에 낱낱이 흩어지는 무의미한 언어로 소통을 하고 온 날은 꼭 하루 이틀 두통에 시달렸다. 그리고 결국 그런 소모적인 만남 끝에는 피로감과 불쾌함만이 남았고 그 기분을 정화하기 위해 또 에너지를 소비해야만 했다.


아마도 한없이 가벼운 표면만 내보인 나 역시 그들에게는 ‘그런 이’ 였을 것이다. 외로움의 본질이 무언지도 모른 채 그저 외부에서 무언가를 찾아다니다 스스로 무의미한 만남의 허구만 증명한 셈이다.


가끔은 그저 내가 그렇게 사랑하던 이들과 함께하던 편안하고 따뜻하던 시간들이 그리웠다. 그래서 알면서도 또 혹시나 하고 빈 껍데기처럼 앉아있다가 유령처럼 흐느적대며 홀로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언제부터인가 '수고스러움과 애씀'이 필요 없는 관계 그래서 스스로도 낯설 만큼 누군가에게 그저 바람처럼 스쳐가는 가벼운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나를 보아주었던 따스했던 존재들 그러나 이제는 안타깝게도 내가 사랑하고 기억하는 그들의 형상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오로지 현재의 이 순간에 있고 우리의 과거는 이미 저편으로 지나가 버렸다. 과거의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걸 인정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금강경의 가르침처럼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은 허망하고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그림자 같고 이슬과 번개와 같은 것이니, 다만 잠시 인연 따라 생하고 멸할 뿐이다.”


그러니 시절 인연도 그 인연이 도래해야 할 때가 되면 지난 그와의 만남처럼 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토록 소중한 인연이 이생의 한 번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비록 형상은 달라져도 또 다른 형태로 우리는 늘 서로의 곁에 있을 것이다. 때로는 여름날의 따스한 햇살로, 가을밤 스쳐가는 시원한 한줄기 바람으로, 겨울 바다의 세찬 파도로, 향긋한 꽃향기를 머금은 봄날의 작은 나비의 모습으로, 그렇게 우린 언제 어디서고 다시 만날 것이다.


가끔은 홀로 남겨진 길 위에서 아직도 먼 길 먼저 떠난 소중한 이가, 우리가 함께 했던 따스한 나날들이 문득문득 참 그립다. 그러나 언젠가 더더욱 깨끗한 눈으로 실상을 바라보고 찰나 사이에 변화하는 생과 멸을 분명하게 볼 수 있기를. 그러니 당장 이 꿈에서 깨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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