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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w Lion Nov 19. 2023

파리발 기차는 떠나고

나는 홀로 남았다.



파리 몽파르나스 (Gare de Paris - Montparnasse). 남편이 타고 있는 기차가 곧 출발한다. 휴가가 끝나 다시 출근해야 하는 남편은 먼저 돌아가고, 나는 파리에 남아 3일 더 머무르기로 했다. 누가 보면 고작 3일 가지고 왜들 저럴까 할 테지만 기차에 혼자 앉아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자꾸만 손을 흔드는 남편을 보니 괜스레 마음이 짠하고 코끝이 시큰하다.




남편이 탄 기차는 서서히 선로를 달리며 속력을 내더니 어느덧 시야에서 멀어진다. 혼자 돌아서는 길. 이제 정말 이 도시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졌다.




비 때문일까 센 강을 따라 늘어선 거리의 서점들이 드문 드문 문을 닫는다. 천천히 걷던 중 가판대 앞에 앉아, 지나가는 이들을 바라보던 할아버지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고, 왠지 멈춰 서고 싶은 마음에 걸음을 멈추고 진열되어 있는 책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주위가 번쩍 환해지고, 눈에 들어오는 책 한 권. 시간의 바퀴, 즉 시간의 순환을 뜻하는 칼라 차크라 탄트라 (Tantra de Kalachakra)였다. 게다가 2000년에 출판되어 20년이 넘은 책은 비닐에 잘 포장된 채로 보관되어 새책처럼 상태가 좋다.


탄트라는 연속성을 의미한다. 우주 삼라만상. 별들과 운하 그리고 우주가 탄생, 지속, 소산, 소멸이라는 순환을 겪듯이, 인간도 중음 (Bardo, 죽음과 다음 생의 시작 사이의 기간)을 사이에 두고 탄생, 인생, 노년, 죽음이라는 순환을 반복한다. 그리고 우린 각자의 업의 결과로 재생과 소멸을 거듭하며 반복되는 윤회를 끝도 없이 경험한다.


그런 우리가 이 업의 굴레,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수행법. 밀교 최상의 명상 단계로 스승의 관정을 받아야만 입문할 수 있는 무상 요가 탄트라 수행 중의 하나인 칼라차크라 탄트라.


늘 그 수행법이 궁금했고 언젠가 인연 되어 스승님께 가르침 받기를 오래전부터 간절히 원했던, 그 내용을 담은 책을 비 오는 날, 거리의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모든 탄트라의 목적은, 신성한 빛이 비록 영혼이 짜 놓은 교활한 음모 속에 봉합이 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 각자 속에 신비스럽게 존재하고 반짝이고 있는 이 신성한 빛을 어떻게든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융 심리학과 티베트 불교의 진수 중에서_Radmila Moacanin>




할아버지에게 책을 건네받고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다시 길을 걷다 문득, 내가 이번에는 이 책을 만나기 위해 파리에 왔구나 생각이 들어 가슴 깊이 책을 꼭 품어 안고 이 길을 걸었다.


하루종일 추적추적 내린 비와 찬 바람에 몸은 으스스 떨려오지만 마치 머나먼 곳에서 날 만나러 와준 반가운 도반과 스승을 만난 것처럼 마음만은 벅차고 행복하다. 할아버지의 미소가 내 발걸음을 멈춰 서게 한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어차피 인생은 홀로 가는 길이라며 잘 지내다가도, 어딘지 모르는 창 없는 작은 방에 기약 없이 갇힌 듯 가끔은 숨이 아득해져 올 때가 있다.


그건 아마도 오래전부터 차례로 소중한 이들을 잃은 뒤 찾아온 상실감과 공허함 때문이 아닐까. 혹은 그건 수많은 원인 중 하나일 뿐, 어쩌면 몇 겁의 삶을 지나오는 동안 근원적인 소통이 단절된 채 목적을 잃은 사람처럼 삶을 부유하듯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함께 있으면 마치 영혼이 춤을 추듯 자유롭고 고여있던 탁한 공기가 터져 나와 시원한 바람 되어 순환하고 흐르던, 안타깝게도 그런 소중한 존재들과의 만남은 덧 없이도 짧았다. 상실과 부재 그리고 단절과 그리움은 삶에 주어진 가장 큰 고통이며 주어진 과제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나 자신과의 단절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영원한 시간은 원형을 이루고, 그 안에서 우주와 인생이 영원히 되풀이된다는 니체의 사상을 가끔은 생각한다. 피안에 이르는 것도, 환생하여 다음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도 모두 부정하고, 항상 동일한 삶이 되풀이된다는 니체의 영원회귀.


그러나 나는 같은 삶이 무한하게 반복된다는 그의 사상을 부정한다. 과거에 의해 조건 지어진 지금의 삶, 혹여나 이번 생과 똑같은 삶을 다시 살아야 한다 해도 기꺼이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앞으로 내 생에 남은 시간들을 소중히 아끼며 살아갈 것이다.


시간의 수레바퀴, 칼라 차크라의 가르침대로 영겁의 시간을 윤회의 수레바퀴 안에서 여전히 돌고 돌지만, 변함없이 제자리로 회귀하지는 않을 것이다.






파리의 야경을 바라본다. 아름다운 이 도시의 전경을 내려다보며 문득 좋아하는 숫타니파타의 구절을 떠올려본다. 그러자 굽었던 어깨가 당당히 펴지고 땅에 디딘 두 발에 힘이 실린다. 어디에 있다 해도 또 나 홀로 있다 해도 이 숫타니파타의 가르침처럼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다시 한번 다짐한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초기경전 숫타니파타(Suttanipata)





파리의 시간을 뒤로하고, 원형의 시간을 돌고 돌아 회귀하듯 내가 살고 있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낯설다. 어쩌면 이 모든 것과 처음으로 조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적어도 지금까지의 삶을 똑같이 되풀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편이 기차역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소중한 이가 기다리고 또 돌아갈 곳이 있어 여행은 더 값진 것인지도 모른다. 남편에게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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