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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w Lion Jan 14. 2024

겨울밤 파리의 노트르담

노트르담 드 파리


La comédie musicale 

«Notre-Dame de Paris »



파리 ‘팔레 데 콩그레’에서 (Le Palais des Congrès de Paris)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를 보고 난 뒤 남편과 함께 부슬비가 내리는 밤거리를 걸었다. 뮤지컬을 보고 노트르담 대성당을 다시 보니 느낌이 또 남다르다.




오래전 우연히 읽게 된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꼽추>, 파리의 노트르담(Notre-Dame de Paris)은 나로 하여금 가보지 않은 15세기 1480년대의 파리를 상상하게 했다. 그 이후 <노트르담 드 파리> 1998년 오리지널 초연 영상을 유튜브로 셀 수 없이 보며 아름다운 곡과 무대에 매료되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 공연을 파리에서 직접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이런 날이 정말 왔다.


나는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은 뭔가 자유로운 느낌이 드는 음악과 그런 주인공이 나오는 이야기를 좋아했는데 스페인 감성이 가득 묻어나는 ‘파코 데 루시아’의 플라멩코 기타 선율이나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라는 포르투갈의 영혼 ‘아멜리아 로드리게스’의 파두(fado), 아르헨티나의 탱고 그리고 <연금술사>의 산티아고와 <노트르담 드 파리>의 집시여인 에스메랄다가 그랬다.


그래서인가 에스메랄다가 처음 등장하며 부르는 곡 <보헤미안, Bohémienne>. 이 곡을 들으면 스페인 그곳의 밤하늘 별 따라 꿈을 꾸듯 사는 안달루시아의 자유로운 집시가 된 기분이 들었다. 비록 유럽에 와서 본 집시의 실상은 내가 상상한 것과는 크게 달랐지만.


그렇게 몸은 한국에 있었지만 그곳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것 같아 마음은 늘 넓은 세상 어딘가를 떠돌았다.


Notre Dame de Paris_Bohémienne



엄마가 들려주던 얘기
그리운 그곳은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산과 그곳의 사람들 얘기
고향과도 같은 그곳

부모를 잃은 나에게 고향은 파리였지만
바다를 떠올릴 때면 나는 늘 그곳에 있지
상상 속의 안달루시아

보헤미안 나는 고향을 알지 못해
보헤미안 길 위에서 난 자랐지
보헤미안 보헤미안
결코 내일을 알 수 없어
보헤미안 보헤미안
거역할 수 없는 내 운명

맨발로 뛰어다니던 내 어린 시절의 프로방스
집시들의 여행길은 끝이 없고
방랑은 곧 나의 인생
이 땅의 모든 길 지나
세상 끝에 닿는 그날, 그날까지

그곳 안달루시아 그 강물은 내 몸을 흐르고
나의 안달루시아 언젠간 널 만나게 될까

Notre Dame de Paris_Bohémienne




남편과 뮤지컬 장면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며 대성당을 향해 걷는 길. 노트르담 대성당의 종지기 콰지모도와 프롤로 신부, 근위 대장 페뷔스가 차례로 에스메랄다에 대한 마음을 노래한 곡이자 내가 좋아하는 곡 중의 하나인 <Belle, 아름답다>. 남편이 걸으며 이 곡을 흥얼거린다


프롤로 신부의 명령으로 에스메랄다를 납치하려다 체포된 콰지모도. 형틀에 묶여 애타게 절규하며 물 한 모금만 달라던 그에게 에스메랄다가 다가와 물을 건네고 그는 사랑에 빠진다. 모두가 외면하던 그에게 다가와 준 단 한 사람.



Notre Dame de Paris_Belle




지난 나의 삶에서는 내가 꿈꾸고 소망하는 것들이 아무리 머리 굴려 이리저리 곰곰이 생각해 봐도 대부분이 도저히 현실이 되기 불가능한 그저 ‘한낱 꿈‘이었다. 어느새 내게 있어 꿈과 희망이란 것들은 낮에 뜬 별처럼 미미해지다가 저 깊은 수렁 속으로 처박혀 사라지거나 한때는 황홀하게 빛났으나 폭발하고 그 존재가 사라져 버린 광대한 우주의 작은 별과 같았다.


꿈은커녕 그저 숨 쉬며 사는 것만으로도 대견하다 여겨야 했던 지난한 날들이 대부분이었다.


오죽했으면 프랑스 오기 전에 절에서 우연히 마주친 노스님께서 나를 보시더니 대뜸 “보살님 그동안 참 고생 많았겠다. “라고 하셨다. 듣자마자 깊은 곳에서 뜨거운 뭔가가 서럽게 터져 나와 바보처럼 눈물 콧물 흘리며 어떻게 아시냐 물으니 중 생활을 오래 해서 이제 얼굴 보면 대충 안다고 하시던 스님.


 “좋은 사람 만났으니 이제 가서 잘 살면 된다.” 


눈물 흘리는 나를 따뜻하게 다독여주셨는데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짧지만 강렬하고 또 신비한 만남이었다.


쓰고 보니 누가 봐도 당신이 좀 억울하게 생겼거나 고생 많이 하게 생겨서 그런 게 아니냐는 의문을 가지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의도와는 다르게 그와는 되려 반대 이미지 인지라 더더욱 신기했던 경험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만큼 돌아보면 행복한 순간을 손에 꼽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다 행복이 찾아봐도 만끽하기도 전에 손바닥 위의 모래처럼 눈앞에서 스르르 사라지며 바로 고통으로 변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누군가가 내 삶을 통째로 잡아 흔들고 밟아 짓이기 듯 뭘 해도 풀리지 않고 사방이 꽉 막혀 숨도 쉴 수 없었는데 그래도 어떻게든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살다 보니 신기하게도 마음에 품었던 크고 작은 꿈들이 어느새 하나하나 현실이 되고 있다.


눈 감으면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잠드는 대신 내일을 기대하며 행복하게 잠들 수 있기를 바라던 작은 꿈부터,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평범한 가정을 꾸린다거나, 혹은 검은 고양이와 함께 매일 창밖의 밤하늘에 뜬 달을 보고 싶다거나, 어딘가에서 조용히 글을 쓰며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들부터, 아주 멀고 먼 곳으로 떠나 그곳에서 다시 태어난 듯 살고 싶다던 비현실적인 꿈까지.


그리고 스페인의 뜨거운 태양 아래 도시의 이곳저곳을 맨발로 걷듯 자유로이 걷거나, 페르난도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읽으며 상상만 하던 리스본의 테주강을 마주한다거나, 리스본 언덕 위에 있는 작고 어두운 파두 클럽에 앉아 이름 모를 가수가 부르는 구슬픈 노래, 파두를 직접 듣거나 또 좋아하던 <노트르담 드 파리>를 파리 현지에서 직접 보게 되는 일까지 하나하나 모두 자연스럽게 현실이 되었다.


그러니 누구든 혹시라도 꿈을 꾸는 것이 사치라 여겨질 만큼 힘든 현실에 놓여있다 하더라도 부디 끝까지 체념하지 마시길. 우리들 삶 속에 기쁨과 행복이 마치 한낮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금방 사라져 버린다 해도 마음속에 꼭꼭 담아 간직하고 있는 꿈들은 때가 오면 슬며시 피어날 테니 부디 마음속 소중한 소망들을 깊이 간직해 주기를.


나 또한 마찬가지로 가슴속에 간직한 크고 작은 꿈들을 지난날 쉬이 그러했듯 바보같이 스스로 체념하고 져 버리지 않도록 늘 가슴에 귀를 기울이고 실천하고 또 사랑하고 응원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꿈들은 그저 한 밤에 꾼 짧은 꿈처럼 눈을 뜨면 실체 없이 사라질 테니까.



뮤지컬이 끝나고 며칠이 지났건만 여전히 틈만 나면 <Belle>을 흥얼거리는 남편 덕분에 그날의 행복한 순간을 잊지 않고 계속 마주한다.


노트북 모니터로만 보던 영상이 눈앞의 현실이 되어 더더욱 꿈처럼 환상적이던 공연, 뮤지컬이 끝난 뒤 깊은 여운을 안고 걷던 부슬비 내리는 파리의 밤거리,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옆에서 함께 걷는 남편. 이 모든 게 마치 꿈만 같은 날이었다. 이렇게 하나의 꿈이 또 현실이 되었으니 이 날 이후로 나는 전보다 그 꿈의 크기만큼 더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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