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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w Lion Oct 31. 2024

모호함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에 대하여

가을이면 내가 사는 이곳은 비가 자주 내리고 어두운 새벽부터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른다. 집에 있는 모든 창을 활짝 열면 묵묵한 습기를 머금은 짙은 안개가 집 안 가득 밀려들어 와 열이 오르고 들뜬 나의 화기를 차분하게 어루만져 준다. 아마도 아주 오래전 대관령 양 떼 목장부터였을 것이다. 안개가 짙은 날을 유독 좋아하게 된 것은.


며칠 전 우연히 읽었던 무라타 사야카라는 작가의 <편의점 인간>에 이런 대화가 나온다.


“나를 숨겨줘요. “

”나를 세상으로부터 숨겨달라고요. “


보통의 무리에 소속되지 못하는 인간은 무시당하고 간섭받고 강요당하고 때로는 조롱당하다 최종적으로는 무리에서 추방된다. 사회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남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속도나 다른 형태를 가진 삶을 사는 이들은 말 그대로 비정상이며 그저 제거해야 하는 이물질일 뿐이다.


사회에서 규정한 보통의 삶을 연기하며 살아가는 주인공 후루쿠라에게 같은 부류의 인간인 시라하가 불쑥 내 던진 말이다.


“나를 숨겨줘요. “ 순식간에 밀려든 자욱한 안개에 당황하다 순간 일행을 잃은 내가 혼자 나지막이 되레 었던 말이다. 그렇게 짙은 안개는 내 생애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날 깨달았다. 안개가 짙게 깔리면 굳이 숨으려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더듬더듬 물 흐르는 소리에 이끌려 간 텅 빈 목장 언덕 위 어딘가. 안개에 흠뻑 젖은 벤치에 누워 사물의 경계도 방향도 분간이 되지 않는 그 모호함 속에서 비로소 슬며시 자연스럽게 그리고 무척 타당하게 세상에서 제거 돼버렸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지난 5월 인도에 다녀온 후 한 며칠 열병을 앓는 사람처럼 한동안 무력하게 앓았다. 그리고 외부를 향해 열려있던 모든 문을 꼭 닫았다. 불쑥 찾아온 생경한 무언가의 움직임이 서걱서걱 거슬리고 불편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눈을 감고 입을 닫고 귀를 막고 적막 속에 침잠했다. 보고 싶은 것도 이렇다 할 얘기도 그리고 듣고 싶은 이야기도 또 하고픈 이야기도 없었다. 시공간을 초월하며 쉴 새 없이 유영하던 생각도 불시에 생명을 다 한 것처럼 갑자기 툭 멈추어버렸다.


그래서 그대로의 삶을 살았다. 단조롭게 그리고 고요하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고 채근하지 않고, 정말 있는 그대로. 그럴만하니 그러리라 생각했고 살다 보면 이럴 때도 있는 거라고 웃어넘겼다.


그렇게 가벼이 살다 보니 어느새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짧아서 더 애민한 가을이 찾아왔다. 붉게 버석이며 차츰 말라가는 낙엽의 건조한 냄새가 대기 가득 코 끝에 살랑이고, 안개 자욱한 날이나 비가 온 날에는 포슬포슬 젖은 흙과 비 맞은 나무에서 나는 비릿하고 향긋한 가을 냄새가 부드러운 찬 바람에 실려온다.


계절의 흐름과 현재의 순간에 푹 빠져 살다가도 여전히 습관처럼 지난 시간들이 툭툭 떠오른다. 그럴 때면 안개 가득한 목장 어딘가 누워있던 나를 생각한다. 마치 그때의 안도감이 여전함을 다시 상기하듯이. 그럼 안갯속의 내가 거대한 협곡으로 그려진다. 수백수억만 년에 걸쳐 켜켜이 쌓여온 지질층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협곡.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또 언제까지일지도 모른다. 삶의 모든 이야기가 지질층처럼 단단히 그리고 켜켜이 쌓이고 쌓여 나 자신이 어느새 우뚝 솟은 거대한 협곡이 되었는지는.


지난 시간 속 어느 날, 안개 자욱한 대관령 양 떼 목장에서 느꼈던 그 안도감은 그로부터 한참 후 내가 태어나고 살아왔던 땅을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일곱 번의 가을이 지나고 내가 왔던 곳으로 잠시 돌아간다. 이전의 내가 아닌 채로. 그리고 돌아갈 곳이 있는 채로. 그러니 아마도 아니 어쩌면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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