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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동윤 Apr 01. 2023

<칼럼>알고리즘의 신학

알고리즘이 던지는 인간학적 화두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


 전 인류 역사에서 가장 많이 불린 단 하나의 이름이 있다면 바로 이 이름일 것이다. 신을 흠숭하는 마음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또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마음으로 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을 불렀고, 또 부르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이름에 담긴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특히 ‘그리스도’의 의미에 대해선 더욱 그렇다. 착각하기 쉬우나, ‘그리스도’는 예수의 성씨가 아니고 그리스어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의, 일종의 호칭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누군가에게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그 이를 영광되게 하거나 또는 그에게 사명을 맡긴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었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말은 궁극적으로는 구세주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예수는 ‘그리스도’, 즉 구세주이다. 십자가에 달린 그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죄가 사해졌으며, 그가 하느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믿음으로써 죄인인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   


 나는 유신론자이지만, 기독교인은 아니다. 그의 십자가 희생으로 인류의 죄가 사해졌으며 그가 신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예수에 의한 구원을 믿지 않는다. 나아가 초월적인 힘이나 존재가 아닌, 인간을 포함한 그 어떤 ‘형이하학적’인 존재도 구원의 매개가 될 순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SNS를 맘먹고 시작한 요즈음, 나는 적어도 SNS 공간에서만큼은 어떤 특정한 존재가 나의 구세주, 즉 ‘그리스도’임을 고백해야 했다. 바로 ‘알고리즘’이란 ‘그리스도’를 말이다.


 올해 들어 나는 나의 콘텐츠로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는 당찬 포부(?)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선 좋든 싫든 SNS 활용이 필수라는 당연한 사실을 재차 실감하게 되었다. ‘내가 SNS라니. 한 세대만 일찍 태어났어도 SNS가 필수는 아니었을 텐데.’ 참 시대적인 운도 지지리도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주어진 엄정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난생 처음으로 SNS라는 존재에 대해 공부란 것을 하기 시작했다. 장돌뱅이들이나 보는 것 정도로 여겼던 부류의 전자책을 사보기도 하고, 있는 힘껏 머리에 힘을 준 채(대개 3대7 정도의 가르마에 40도 각도로 뻗쳐 올렸다.) ‘SNS 성공론’을 설파하는 자칭 성공 멘토들의 ‘인사이트’가 담긴 유튜브를 찾아보기도 했다. 


 궁금증이 생기면 무엇이든 깊게 파고들려는 ‘먹물적 본능’으로 SNS에 대해 공부하다 보니, 이내 SNS에 성공하려면 지켜야 할 몇 가지 ‘계명’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명확한 콘셉트를 잡을 것, 쉽고 자극적일 것, 그리고 콘셉트와 내용물에 걸맞은 해시태그만 사용할 것 등이 그 계명들이었다. 그러나 인간사가 그렇듯, SNS에서도 역시 그 계명들을 모두 지킨다고 해서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사에는 분명 한 인간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종교에서는 대개 그 힘의 원천을 ‘하늘’에 두었고, 기독교는 그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불러왔다. 그런데 인간사에서 하느님이 차지하는 이 ‘성스러운’ 자리를, SNS 공간에서는 알고리즘이 차지하고 있다.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다면, SNS에서의 성공을 위한 일련의 ‘계명’들은 어디까지나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기 위해 존재한다. 개인이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그의 힘만으로는 SNS에서 ‘떡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SNS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알고리즘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철저히 내면의 헌신적 신앙심으로 구원을 판가름하는 하느님과 달리, 애석하게도 이 온라인상의 구원자에겐 가치 판단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판단 근거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알고리즘에겐 ‘수치’가 곧 ‘가치’이다. 일례로 인스타그램의 알고리즘은 특정 게시물에 대해 좋아요나 댓글 등의 반응도나 이용자들의 체류시간 등을 파악한 후, 이 게시물을 추천할지 말지를 결정한다. 즉, 알고리즘에겐 수치가 곧 가치 판단, 나아가 ‘구원’의 기준이 된다는 얘기다. 


 이러한 현실에서 제아무리 진정성 있고 유익하며 미적으로 훌륭한 콘텐츠일지라도 일정한 ‘수치’를 확보하지 못하면 알고리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알고리즘은 그의 본성상 진정성, 유익함, 아름다움 등 주관적 가치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헌데 진정성과 유익함, 그리고 아름다움, 즉 진선미는 오랫동안 인간사에서 특정한 사람이나 사물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왔다. 당대에 ‘수치적으로는’ 실패했다고 여겨진 예술이나 정치적 운동이 후세에 높은 평가를 받게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진선미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의 주관적 능력이 ‘수치’와 ‘가치’ 사이의 사슬을 끊는 역할을 해온 것이다. 그러나 알고리즘은 ‘무능력하다.’ 그에게는 수치와 가치 사이의 사슬을 끊을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SNS 공간에서 일어나는 사용자들의 흥망성쇠는, 바로 이 ‘무능력한’ 절대자에게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수치’와 ‘가치’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러한 ‘무능력’은, 비단 알고리즘만이 가진 결함은 아닌 것 같다. 요즈음엔 사람들도 못지않게 ‘무능력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회적 사례 중 하나가 바로 근래의 연애 ‘시장’이라 생각한다. 당장 ‘결혼해듀오’들과 같은 결혼 정보 업체들만 해도 아예 대놓고 인간을 ‘수치화한’ 등급표를 공개한다. 직업, 집안, 외모, 나이 등을 ‘수치’화해 그 사람의 ‘가치’에 대응한다고 할 수 있는 등급을 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산정한 등급을 기반으로 ‘서비스’를 제공한다. 


 ‘시장’ 상황이 이러다 보니 ‘시장 참여자’들도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소개팅 자리라도 나가면, 당장의 관심사는 소위 ‘스펙’이다. 대화를 통해 파악한 일련의 ‘수치’적 정보들로 ‘시장 참여자’들은 ‘가치 판단’을 내린다. 곱씹어보면, 이는 놀랍도록 알고리즘의 판단과정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그 결과로 만날지 말지가 결정된다는 사실, 즉 ‘0’이냐 ‘1’이냐가 결정된다는 사실까지 닮았다. 이쯤 되면 기실 애프터를 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알고리즘인 셈이다. 차이가 있다면 기존의 알고리즘들보다 그 성능이 떨어지는 대신, ‘교접’이라는 자가복제적 목적을 탑재한 알고리즘이라는 것 정도다.  


 이와 같은 인간, 내지는 인간 인식의 ‘알고리즘화’ 현상은 연애 시장이라는 비교적 거시적인 단위를 넘어 보다 미시적인 일상의 작은 조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평점’이란 조각에서 말이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평점은 식당이나 숙소는 물론, 대학 강의를 포함한 일련의 서비스들을 평가하는 ‘객관적’이고 ‘신뢰할 만한’ 잣대가 되었다. 그리고 분명 평점은 개인의 ‘주관적인’ 평가들이 모인 집단적이고 ‘객관적’인 평가로서 신뢰할 만하다고 볼 수 있다. 


 허나, 이는 역으로 평점이라는 ‘객관적 수치’ 때문에 우리의 ‘주관적인 가치판단’이 왜곡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제아무리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내 입맛엔 맞지 않을 수 있고, 유명하고 실력 있는 사람의 강의라도 나에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평점이라는 사뭇 견고한 지표는, 다수와는 다른 자신만의 가치판단을 스스로 ‘틀린 것’으로 치부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쉽게 말해, ‘평점이 높은’ 식당의 음식을 알아보지 못하는 내 입맛이 촌스럽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한 개인이 다수의 의견에 자신의 의견을 끼워 맞춰야한다는 압박감을 많이 느끼는 우리나라와 같은 사회에선, ‘객관적 수치’로부터 자유로운 ‘주관적 가치판단’이 설 자리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한편, 주류 경제학은 ‘수치가 곧 가치’인 인간과 사회 현상을 지탱하는 이념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주류 경제학에선 어떠한 재화나 서비스의 가치는 곧 시장에서 그것이 교환되는 가치와 동일하다고 본다. 한마디로, 어떤 물건이 1000원에 팔리고 있다면 그 물건의 가치 또한 1000원이라는 것이다. 이는 얼핏 보기엔 당연한 듯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가치 판단은 ‘시장에서 교환되었을 때만’ 그 물건이나 서비스가 가치 있으며, 그 자체의 내재적 가치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숨기고 있다. 언급했던 아름다움, 진정성, 유익함 등 교환 가치로만은 파악할 수 없는 가치들은 인정되지 않거나 아니면 그마저도 교환 가치가 포함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이러한 ‘시장주의적 사고방식’은 학문의 영역을 넘어 우리의 일상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비록 과학과 정보기술에 대해서는 지독한 문외한인 나이지만 추측건대, 어쩌면 이렇듯 점점 ‘수치’가 곧 ‘가치’가 되어가는 인간과 사회는, 알고리즘이 인간사에 깊이 ‘관여한 결과’가 아닌 ‘관여하게 된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만일 이러한 나의 추측이 맞는다면, 그리고 종교가 사회의 산물이라는 사회학적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이제는 SNS 공간에서뿐만이 아니라 현실 공간에서도 ‘알고리즘’이라는 절대자의 은총을 비는 미래가 올지도 모른다. 한 개인이 가진 모든 요소들이 수치화되고, 그 수치를 기반으로 알고리즘이 개인의 삶을 ‘구원’할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그런 미래 말이다. 물론, 별다른 ‘특이점’이 오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여전히 알고리즘은 자유의지가 없을 것이기에, 어디까지나 알고리즘을 다룰 수 있는 자본이 ‘구원’의 실질적 주체이긴 할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상상하고 싶지 않은 미래임에는 변함이 없다. 


 학원 아르바이트와 자격증 공부, 그리고 SNS 관리하느라 한참을 미루다 다시 펜을 든 오늘,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한 친구(이실직고 하자면, 소개팅에서 만났다 흐지부지되었다.)가 새로 시작한 나의 글 계정을 팔로우한 사실을 확인했다. 사심 한 점 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어떻게 나의 계정을 알게 되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계정에 나의 게시물이 ‘추천’되었다는 답변을 했다. 역시나 나의 ‘그리스도’인 알고리즘이 일으킨 ‘기적’ 덕분이었던 것이다. SNS 공간에서 그의 ‘절대자적인’ 위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한 나는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고리즘이여,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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