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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이목 Jul 06. 2024

산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 살아야 한다는 것 3

살아간다는 것 2

 한동안 계속된 어둠 속에서 루드는 잠깐동안 평온하게 누워 있는 것 같았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아무런 통증도 없이 마음이 맑아지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이곳은 어디일까? 루드는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생각할 만큼의 힘이 있지는 않았다. 하긴 어디든 상관이 있을까. 지금의 루드에게는 그냥 고요한 평화가 필요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할 필요로 없이 고요한 안정. 그거면 충분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다시 누군가가 바늘로 자신을 찌르기 시작했다.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주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다. 루드는 여전히 눈을 감고 눈썹과 귀를 움직이며 그 소리들을 주워 들었다. 어제 아침에 들은 목소리다. 차분하고 침착한 목소리다. 그는 생각이 났다. 그건 자신이 화가 나서 베개를 던지는 바람에 베개에 맞아서 코피를 흘린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걱정스럽게 울먹거리면서 발을 동동 구르는 모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드는 그제야 눈을 떴다. 눈부신 조명이 눈을 찔렀다. 모메가 눈을 뜬 할아버지를 보고 기뻐서 소리쳤다.

“할아버지!”

“일어나셨군요,”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루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새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방이었다. 창문 밖은 밤이었다. 그의 앞에는 손녀와 의사 선생님 그 뒤로 하얀 가운을 입은 간호사 고양이가 있었다. 루드는 놀라서 정신이 들었다. 그곳은 병원이었다. 그는 입원한 것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루드가 힘 없이 물었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셨습니다. 그걸 모메씨가 발견하고 저를 불렀죠.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바로 병원으로 옮긴 것이 다행입니다.”

의사 선생님이 어제의 그 차분함으로 답했다.

“할아버지.......”

모메가 여전히 울먹거리면서 말했다. 루드는 그 모습에 미안한 마음도 들고 창피스러운 마음도 들어서 고개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창문이 닫혀 있어서 커튼을 응시했다. 손녀와 눈이 마주치는 것이 두려웠다.

“고맙습니다.......”

루드가 조금은 투박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이제 입원을 하셨으니 치료에 집중해야 합니다.”

“저기...... 나는 오늘 돌아가고 싶습니다.”

“안됩니다.”

의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에는 이전에 만났을 때의 단호함보다도 더욱 단호한 힘이 담겨 있었다. 의사는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비장한 표정을 짓고 루드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서 그의 얼굴에 대고 속삭였다.

“루드 씨 당신은 살고 싶어 하지 않는군요. 그건 살고 싶어 하지 않은 사람이 걸리는 병입니다. 살고 싶어 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심각해지는 병입니다. 그런 병에 루드 씨에서 걸린 것입니다. 이 병은 나이가 든 고양이나 사람이 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노화로 인해서 온몸이 쇠약해지면서 점차 의욕을 잃어가면 당연히 살 의향도 잃어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루드 씨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에게는 저도 있고 손녀인 모메씨도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의사 선생님의 말에 루드는 모메를 힐끔 보았다. 그는 미안함 마음 때문에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여기서 또 화를 내면 걷잡을 수 없이 큰 상처를 모메에게 줄 것만 같았다. 할 수 없이 루드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모메는 기뻐했다. 루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긋지긋한 하얀색 방이었다. 루드는 병원에 입원한 적이 태어나서 한 번도 없었는데도 지긋지긋했다. 아마 화가 난 탓일 것이다.

루드가 입원하자 모메는 이전처럼 다시 원래의 밝은 모습을 되찾았다. 루드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할아버지를 간병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루드의 마음을 다시 되살려주고자 했고 루드가 병에서 낫기를 염원했다. 그래서 모메는 빵집에서 일하면서 있었던 재밌는 일들을 이야기해주기도 하고 수염을 빗질해주기도 하고 귀를 쓰다듬어주기도 했다. 꼬리를 주물러주기도 했다. 루드는 모메의 그런 각별한 마음이 부담이 되었다. 화가 나기도 했지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때처럼 또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모메에게 화를 내는 것은 자신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내는 것과 같았다. 병에 걸리고 난 후부터 지금까지 루드는 성숙해지는 모메에게 몸 쓸게 굴었다. 불평을 하고 심술을 부리고 화를 냈다. 화를 내면서도 제대로 된 미안함이나 고마움을 갖지 않았다. 혼자서 씩씩대다 보면 하루는 훌쩍 지나 있었고 잠이 들었다. 루드는 그런 식으로 모메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새삼스럽게 루드의 마음에 스며들자 루드는 참을 수 없는 미안함이 아려왔다. 자신이 모메보다도 훨씬 어린것 같았다. 둘은 마치 서로 나이를 바꾼 것 같이 한 명은 어른이 되고 한 명은 어려진 것 같았다. 루드는 짜증이 나도 참고 모메의 모습을 잠자코 보았다. 쿠르가 말한 데로 모메는 루드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사람이었지만 그건 모메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모메에게도 루드는 소중한 고양이었다.

이따금씩 모메는 졸았다. 고개를 숙이고 조는 모습이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했다. 루드는 베가 하나를 들어서 조용히 손녀 옆에다가 두었다. 그러자 손녀는 어려져서는 스르르 잠에 청했다. 루드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욱 식 거리는 자신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는 여전히 살고 싶지 않았다. 산다는 것은 아프고 미안하기만 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살아간다는 것은 그 아프고 미안한 일들을 계속해서 해나가는 것이었다. 루드는 그렇게 자신의 세월을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그만 미안하고 싶었고 차라리 자신이 고요하게 사라져 버리는 것이 모두에게 좋을 것 같았다. 모메는 처음에는 무척이나 슬퍼하겠지만 얼마 안 가서 잊고 밝은 모습을 되찾지 않을까. 루드는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보니 도저히 자신의 삶을 스스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모메 때문이었다. 루드는 다시 이전에 생각했었던 사람들의 속마음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봄이 시작되고 다시금 활기를 띄기 시작하는 아빌의 항구의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과 고양이들의 속마음에는 각자의 아픔과 슬픔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어쩌면 그들이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는 루드에게 모메와 같은 소중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 열심히 살고 싶지 않음에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루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은 열심히 살 힘도 없었고 늙었고 병으로 너무 아팠고 소중한 사람에게 도움도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왜 살고 싶지 않을까. 손녀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루드는 자신을 탓했다. 외로움이 느껴졌다. 옆에 소곤히 자고 있는 모메를 보면서 모메도 사실 외롭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루드는 아픔과 상념과 씨름하다가 힘겹게 잠에 들었다.

다음 날, 루드에게 쿠르가 찾아왔다. 쿠르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루드에게 위로를 건넸다. 쿠르는 약간 유쾌했다. 자신을 어색하게 맞이하는 루드의 모습에서 이전에 유독 자신에게만은 겸손해지고 소심해지는 루드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많이 늙으셨구먼.”

쿠르가 말했다. 여전히 웃음이 가득했다.

“괜찮아요......”

루드가 어색하게 말했다.

“그렇게 살기 싫습니까?”

쿠르가 물었다. 루드는 쿠르를 쳐다봤다. 처음 쿠르를 봤을 때, 쿠르는 젊고 강해 보였다. 너무 강해 보여서 루드는 약간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고집이 완강하고 완고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쿠르조차도 여러 세월이 지난 지금은 온화해 보였다. 기분 좋은 버터향이 풍겼다. 처음 쿠르에게는 이런 버터향이 풍기지 않았다. 아마 오랜 시간 동안 빵을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벤 생활의 향기이리라.

루드는 답을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답을 한다고 소용없었다. 자신이 살고 싶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고 분명했다. 이 아픔을 더 이상 겪고 싶지 않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한 가지가 있을 뿐이라고. 루드는 창밖만 바라봤다. 창밖에는 거리를 지다 다니는 사람들의 소리가 엷게 들려오고 있었다.

“빨리 낫길 바라요.”

쿠르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루드는 가만히 있다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한 명의 사람이 왔다. 항구에서 일하는 머크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루드에게 위로를 건넸다. 루드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사람이 자신에게 찾아와서 위로를 건네었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는 얼떨떨하게 위로를 받았고 뒤 이어서 오는 마을의 사람들과 고양이들을 보고서도 역시나 얼떨떨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루드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위로나 격려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딱 한 번, 아주 옛날에 루드가 처음 아빌로 왔을 때, 받은 환대가 전부였다. 그때에는 아빌에는 화가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루드는 귀한 사람이었다. 간판이나 벽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루드는 그때 행복했을까?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행복한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루드는 그 행복을 기억하기에는 지금의 불만이 너무나 커서 단지 기억을 상기하는 것만 가능했다. 기억에 묻어 있는 감정까지 되살리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그 뒤로는 그런 환대나 사람들과의 어떤 애정을 나눈 기억은 없었다. 그는 무뚝뚝하고 사교성이 부족했고 그 자신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거나 감정을 공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루드의 주변에는 그 어떤 사람이나 고양이도 있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모메는 루드와는 완전히 달랐다. 모메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루드는 외로움을 느낀 적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외로움 때문에 괴롭지는 않았다. 그런 루드에게 마을의 고양이들과 사람들이 병문안을 오기 시작한 것이다. 루드는 처음에 자신을 기억해서 그런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루드가 처음 마을에 와서 환대를 받은 후부터는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흘렀을 터인데 어째서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을까? 루드는 갖가지 의문과 의심이 들면서도 그들의 위로를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게 받았다.

“빨리 나으세요.”

“대화를 하다 보면 다시 살고 싶어 질 거예요!”

“사랑을 나눠요!”

루진은 그들의 말들을 받으면서 마음 어딘가에 이상스레 피어난 서투른 꽃과 같은 무언가가 태동하는 것을 멀끄러미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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