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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Jan 18. 2024

할머니의 죽음

삶의 덧없음과 해외생활의 고충

작년 5월 결혼 준비 때문에 잠깐 한국을 방문하였다.

한국에 들를 때면 아빠는 늘 하루빨리 할아버지와 할머니 집에 들러 인사를 드리라고 닦달했고 공항에서 집에 가는 길에 꼭 본인 휴대폰을 쥐여 전화를 시켰었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그런 일이 없었다. 아빠가 공항에 직접 나를 데리러 오지 않고 내가 택시를 타고 집에 왔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솔직히 편했다. 12시간 비행 직후 할 말도 없이 멀뚱멀뚱 할머니 네에서 앉아있으면서 한국엔 언제 들어올 건지, 빨리 시집가야 한다는 똑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아도 돼서.


그런데 내가 한국에 들어온 지 며칠 안 되어 할머니가 폐렴으로 갑자기 대학병원에 입원하셨다. 난 그때까지만 해도 할머니가 워낙 예민하다 보니 큰 병이 아닌데도 유별나게 군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게 응급실에서 다인실 병실로 옮겨진 후 할머니가 빨리 개인실로 보내달라고 아빠에게 신경질을 부렸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다음 날 할머니는 자리가 생긴 병원 특실로 이동하였고, 병세도 급격히 위독해졌다.


아빠는 그 뒤 며칠 동안 병원에서 할머니의 곁을 지켰다. 입맛이 까탈스러운 할머니는 병원식을 거부했고, 엄마는 아빠 손에 전복과 각종 뼈를 고운 뽀얀 국물을 보온병에 가득 담아 들려 보냈다. 

그다음 날 아침, 할머니는 엄마한테 국물이 너무 짜니 싱겁게 새로 고아서 보내달라고 전화를 했다. 

엄마는 "아, 국물이 너무 짜요? 네. 그럼 새로 해서 다시 보내드릴게요." 하고 전화를 끊더니 피식 웃었다. 

"내가 괜히 시키지도 않은 국물을 달였다가 일만 늘어났네. 까다로운 할마시, 기운이 넘치시네. 이따가 다시 재료나 사러 가야겠다."라고 나한테 가벼운 투정을 했다.


엄마는 결국 그 두 번째 국물을 만들지 못했다. 몇 시간 뒤에 할머니의 상태가 매우 위중하고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전화가 왔고, 병원에서는 할머니를 중환자실로 옮기고 싶어 했다. 그러나 중환자실은 코로나 규정으로 면회가 전면 금지되었기에 할머니는 특실에 남아있기를 선택하였다. 


그다음 날 할머니 상태가 더 위중하니 손주들도 할머니를 보러 오라고 전달받았다. 병원 규정상 손주는 직계가족으로 분류되지 않지만 이건 임종 면회였다. 나는 웨딩드레스를 입어보고 오는 길에 엄마와 같이 병원을 들렀다.


특실로 향하는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니 작은 고모, 고모부, 큰고모, 사촌 오빠 내외가 입구 밖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작은 고모는 들릴까 말까 한 힘없는 목소리로 나를 반겼다. 

나는 큰고모가 이끄는 특실 병동 안에 들어갔고, 병동 앞 입구에 있던 수간호사가 나를 보자마자 큰고모한테 매섭게 쏘아댔다. "보호자님, 2번 병실 가시는 거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직계 가족만 면회가 가능한 거고, 손주들은 면회가 불가능해요. 할머니가 워낙 위독하신 상황이라 제가 편의를 봐드리는 거지, 아까부터 자꾸 손주들이 오가는데 이러시면 안 됩니다. 지금 이 분까지만 받고 이제부터는 새로운 분 면회 불가능합니다."


나는 수간호사가 말한 위독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철렁하게 꽂혀 감사합니다라고 머리를 주억거리며 병실로 급히 향했다.


1여 년 만에 만나게 된 할머니는 너무 작았다. 원래도 말랐었지만 생기가 다 빠져나간 여윈 몸은 잔뜩 웅크려져 더더욱 연약해 보였다. 링거와 기계가 할머니에게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할머니는 수증기 약이 나오는 플라스틱 튜브를 물고 힘들게 숨을 쉬고 있었다.


"할머니, 저 윤영이예요. 보이세요?"


할머니의 눈동자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지만 할머니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튜브를 뺀 할머니는 눈이 잘 안 보인다며, 나의 다가오는 결혼에 대해 좋은 소식이라고 속삭이셨다. 그리고는 튜브가 무거워서 입에 물고 있기 힘드니 내 손으로 잡아달라고 힘겹게 읊었는데 얼른 잡은 튜브는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난 할머니가 내 작은 손길에도 아파하진 않을지 걱정스러워하며 할머니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엄마도 곧이어 병실에 들어왔고, 난 아무 말 없이 할머니를 어루만졌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별로 할 말이 없었고, 이번 만남도 평상시와 같이 십분 남짓이었다.


"할머니,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저 8월에 결혼식 하러 오면 할머니 집에서 뵐 테니까 얼른 퇴원하세요."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얼른 튜브를 빼고 나한테 "결혼 잘해" 한 마디를 했다. 

할머니 스스로도 내 결혼식에 오지 못 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눈물이 울컥 나와 빠르게 뒤를 돌아 병실을 나섰고 다시 보호자 대기실에 도착했을 때에는 난 마스크가 다 젖도록 펑펑 울고 있었다.


할머니는 그로부터 이틀 후 숨을 거두었다. 


할머니는 참 좋은 마지막을 겪었다. 


아흔이 다 되도록 그 흔한 고혈압도 없었고, 마지막 딱 일주일간만 아팠다. 남편과 자녀들, 손주들이 다들 찾아와서 마지막 인사를 해주었으며 임종도 여러 명이 함께 해주었다. 짧게 아팠기 때문에 병원에서 살다시피 한 자녀들도 지치지 않고 임종을 지킬 수 있었고, 본인의 죽음에 대해서도 미리 인지하고 차분하게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게다가 다들 진심으로 할머니의 마지막을 슬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참 덧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차가운 사람이었고 나를 딱히 예뻐하지도 않았다. 여덟 명의 손주 중 아픈 손가락은 있었지만 그 아이의 마지막 몇 년을 제외하면 딱히 할머니가 애틋하게 여기거나 애정을 표현했던 적이 없었다. 할머니에게 딱히 살가웠던 손주도 없었을게다. 


할머니는 돈이 그렇게 많은데도 손주들한테 설날을 제외하면 용돈도 거의 안 주셨다. 초등학교 5학년때 반 회장이 됐다고 하니 할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3만 원을 용돈으로 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내가 더 어렸을 때 오른쪽 발가락을 특이하게 움직이는 걸 보고 할머니가 자기는 양쪽 발가락을 똑같이 움직일 수 있고 아빠는 양발가락 둘 다 못 움직이는데 나는 한쪽 발가락만 된다니 신기하다며 웃으셨다. 엄마는 부엌에서 일하다가 이 이야기를 나중에 전해 듣고는 내가 할머니를 닮은 구석이 있다는 것에 언짢아했다. 그 외엔 아픈 손가락이었던 사촌동생을 잘 챙겨달라고 나에게 여러 번 강요하던 게 내게 남은 할머니와의 추억의 전부다.


그런데도 이번 친할머니의 죽음은 외할머니의 그것보다 훨씬 더 여운이 깊고 머릿속이 복잡하여 글로 내 감정을 정리해야만 했다. 감정적인 거리가 멀었음에도 규칙적인 가족 모임을 통해 자주 얼굴을 뵀던 것이 알게 모르게 할머니에 대한 정이 층층이 쌓여갔던 것 같다.


내가 지금처럼 계속 외국에서 살면서 아이를 낳게 된다면 내 아이는 조부모와의 관계에서 이 정도 얄팍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조차 매우 어려울 것이다. 물리적으로 자주 얼굴을 볼 수 없어 감정적 유대를 쌓기도 힘들 테고 언어 장벽도 매우 크게 다가올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늙어서 내 아이와 손주와 먼 곳에서 살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할머니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편안한 임종을 맞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가까운 미래에 내 부모님의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하고 쓸쓸함을 드릴 수도 있겠지.


시간이 지날수록 해외살이의 어려움이 차곡차곡 쌓아지고 그에 대한 고민도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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