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으로 상담을 찾으시는 분들은 많은 경우, 실패 경험을 안고 오십니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던 무언가를 얻거나 이루는데 실패했는데, 그 상처가 너무 컸거나, 너무 오랜 시간 실패를 반복한 경우, 기분이 우울해지고, 활력이 없어지며, 희망이 없는 끝 없는 터널을 통과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우울증을 우리 뇌에서 자동차 기아를 낮춘 것에 비유합니다. 자꾸만 길이 험하다 보니, 기아를 낮춰 좀더 천천히 나아가겠다는 의도인거죠.
우울증 약을 복용하여 그 기아를 다시 억지로 높일 수는 있겠지만, 그 효과는 약을 끊으면 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약을 복용하는 동안에는 이상하게 감각이 무뎌지는 느낌이 들구요. 그래서 심리 상담에서 사용하는 한 가지 전략은, 우리가 현재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을 살짝 비틀어 좀더 희망적이거나, 의미 있는 상황이라고 스스로 인지하는 겁니다.
이걸 영어로는 'Re-frame'이라고 하는데요, 마치 액자 속 그림이 있다면, 그림은 그대로 두고, 액자 (Frame)만 갈아끼운다는 걸 의미합니다. 즉, 현재 상황은 있는 그대로 인지하되, 그 상황을 이해하는 틀을 바꾸어 보는 겁니다.
우울증을 경험하고 계신 분들은 흔히 현재 자신의 상황을 설명해주는 완전무결한 설명법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상태에서, 그 완전무결한 설명법을 머리 속으로 매일 반복하며 강화해나가는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상담사가 초반에 하는 일 중 하나가, 그 완전무결한 스토리에 구멍을 푹푹 내는 겁니다. 그래서 그 스토리에 대한 내담자의 확신을 조금씩 흔듭니다.
심리 상담 대학원 마지막 학기 융 심리학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때 교수님께서 한 청소년을 상담했던 경험을 공유해 주셨습니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며 이제 삶의 의욕 자체를 잃어버린 남자 아이의 이야기를 하며, 그 아이의 상황을 힘들게만 보는 대신, 그리스 신화의 영웅담에 빗대어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이름을 남긴 영웅들이 고향을 떠나, 어디 먼데 가서 괴물을 때려잡고 돌아와, 자기 정체성을 찾는 상징적인 이야기들이 있죠. 그 이야기를 통해, 그 학생은 자신이 '영혼의 늪지대'를 통과하는 영웅담의 주인공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Hollis, 1996).
지금 힘든 시기를 지나가고 있다면, 이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겁니다. 하지만 내 삶을 책 한권에 비유한다면, 끝이 없을 것 같은 이 시기도 한 챕터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내담자들과 함께 지금 현재 챕터뿐만 아니라, 이전 챕터와 이후에 올 챕터의 제목을 생각해 보는 연습을 해봅니다. 정말 놀랍고도, 희망적이기도, 때로는 유머러스한 아이디어들에 함께 울기도, 웃기도 합니다.
내가 원한다고 생각한게 이게 맞긴 한건지?
(지금 무찌르고자 하는 몬스터를 잘못 고른건 아닌지?)
내가 실패라고 정의하는 이 상황을 정말 실패로만 바라봐야 할지?
(이 시기가 이야기의 마지막 장인줄 알았는데 중간 장에 불과하다면?)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길은 정말, 딱 이 길 하나 뿐인지?
(같은 결말까지 가기 위해 스토리를 완전히 다르게 풀어갈 방법은 없는지?)
내가 바라는 사랑과 인정이 딱 고 모습 그대로여야만 하는지?
(내가 꿈꾸는 왕자나 공주가 알고 봤더니 개구리거나 여자 슈렉이라면?)
지금 현재 상황이 어렵지만, 이걸 극복하고 나면 나에게는 어떤 새로운 능력이 생기는지?
(슈퍼히어로는 변신 과정에서 제일 괴롭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므로)
심리 상담 대학원의 한 젊은 여교수는 어느 날 수업 중에, 자기는 나이 들어 스타워즈에 나오는 요다처럼 지혜로운 요다 할머니가 되고 싶다 했습니다. 저는 힘든 시기를 지날 때면, 120세가 되어 쭈글쭈글해진, 하지만 한층 여유로워진 나 자신이 옆에서 함께 걸으면서 저를 타일러 주기도 하고, 저의 갇힌 생각에 구멍을 숭숭 뚫어주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한국은 한창 무덥다지만, 밴쿠버는 이미 해가 짧아지는게 느껴지고, 앞으로 다가올 반년 간의 비와 어둠이 벌써 코 앞인 기분이 드는 하루네요. 다가올 어둠과 절망의 계절을 어떤 스토리로 바꾸어 볼지, 저도 오늘 하루 생각해 보렵니다.
연습 1. 내가 지금 '영혼의 늪지대'를 지나고 있다면, 그 늪지대를 통과하기 이전의 챕터는 어떤 제목일까요?
연습 2. 내가 지금 '영혼의 늪지대'를 지나고 있다면, 그 늪지대를 통과한 이후의 챕터는 어떤 제목일까요?
참고.
Hollis, J. (1996). Swamplands of the soul: New life in dismal places. Inner City Boo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