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훈의 <시티 보이즈>
요즘 뛰는 사람들이 많다. 주변 지인들이 업로드하는 사진들을 보면 러닝이 유행한다는 게 실감 나면서도 다들 운동하고 있구나, 하는 자극도 받는다. 러닝, 진입 장벽이 굉장히 낮아 보이는 운동이다. 그렇게 오늘 저녁에는 달려야지! 다짐을 하고는 한다.
문제는 항상 꾸준함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다짐은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난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다거나 의지가 약하다는 결론을 반복해서 확인한다.
그것이 꽤 오래 반복돼서인지 몰라도 운동 잘하는 사람들을 항상 선망해 왔다. <시티 보이즈>도 비슷한 맥락에서 끌렸고, 스포츠를 소재로 한 문학 작품에서 읽히는 메시지는 어떨지도 기대됐다.
정보훈의 장편소설 <시티 보이즈>에는 각자의, 그리고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분투하는 육상부 선수들이 등장한다.
육상 선수가 되어 아빠와의 마지막 약속을 지키고자 하는 희재, 코치 도철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진우.
진우와 단짝이었으나 모종의 사고로 멀어지게 된 효진, 야구부에서는 빛을 보지 못한 도루왕 정민.
희재는 육상이 단체종목임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한다. 주변 인물들도 희재의 진심을 알게 되면서 폐부 직전인 무진고 남자 육상부는 활기를 되찾는다. 그렇게 서로 훈련의 결과를 피드백하고 머리를 맞대어 작전을 세우면서 함께 성장한다.
결국 무진고 육상부만의 방식으로 육상이 단체 종목임을 입증하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여느 스포츠 드라마를 소설로 읽는 느낌이었다. 미성숙한 청소년 주인공들이 성장하는 서사, 스포츠 소재의 작품에서 흔히 보이는 갈등 구조나 목표를 달성하는 내용 등이 새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만 무진고 육상부원들이 트랙을 달리며 입증한 협력의 가치만큼은 아름다웠다.
육상. 최대한 빠른 속도로 트랙을 달려서 결승 지점에 가장 먼저 도착한 선수가 이기는 운동 아닌가. 그러므로 선수 개개인의 속도와 기록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티 보이즈>에서는 숫자 이외의 것들에 주목한다. 이를테면 배턴을 올바르게 건네주는 법, 슬럼프가 왔을 때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방법이랄지, 버거운 상대를 앞지르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작전을 세우는 과정 등.
선수들의 속도만 빠르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다. 배턴을 놓치는 실수가 반복된다면 우승과는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다. 배턴을 넘겨주는 손길들이 적확하게 맞닿는 일도 선수들의 속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중요한 순간에 빛나는 협동심, 혹은 협력의 가치. 소설의 메시지는 이것이 아닐까.
써놓고 보니 소설의 주제를 공자님 말씀 정도로 파악한 것 같지만,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메시지라는 생각도 든다.
언젠가 뉴스를 끊은 적이 있다. 세상 소식이 궁금해서 포털 사이트며 유튜브 등을 매일 들여다봤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뉴스 헤드라인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라는 걸 깨달았다.
사회적 갈등들이 그 수위를 점점 갱신하며 심화되고, 해결되지도 않은 채 시간만 흐르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가 더욱 심화되었다는 진단은 꽤 오래 전부 들려왔으나 그 진단에 걸맞은 극단적인 표현과 수단들만 쌓여왔었다.
협력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극단적인 표현과 수단들.
뉴스를 다시 보게 된 것은 그것들이 스트레스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한 즈음이었다.
군부 독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계엄을 이 시대에 다시 목도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나씩 수면 위로 올라오는 부정부패의 증거와 이를 덮기 위한 극단적인 행위. 상식을 압도해 버리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기란 너무나도 끔찍했다. 작년 12월은 협력이 실종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시기가 아닐까 싶다.
<시티 보이즈>에서 한 가지 더 인상 깊었던 지점은, 협력하기 위해서는 소통이 필요함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과거 효진은 아버지의 사고로 인해 진우와의 육상 경기에 참가하지 못하게 된다. 단짝이었던 진우가 걱정할 것을 염려해서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둘의 사이는 멀어진다. 이후 무진고 육상부에서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더욱 돈독한 육상부 동료 선수로서 뛸 수 있게 된다.
희재 또한 코치 도철에게 오해를 품게 된다. 과거, 희재의 아버지 현진 대신에 도철이 아시안게임에 나가서 메달을 걸었다는 것. 상대팀 코치의 이간질이었으나, 오해를 해소하지 못한 채로 연습 경기를 뛰다가 큰 실수를 하게 된다. 이후 도철의 진심을 확인하고서 희재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돌아가신 아빠와의 약속을 지켜낸다.
이렇듯 <시티 보이즈>의 육상부는 쌓인 오해를 해소하고 간직한 진심을 내보인 다음에야 더욱 단단히 결속할 수 있었다. 협력과 소통은 어쩌면 같은 의미를 공유하는 단어인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소통만큼은 제대로 이뤄지고 있을까.
153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너진똑'이라는 유튜브 채널이 있다. 어려운 교양이나 지식을 쉽게 설명하고, 유용한 생활 정보도 전달해서 인기가 많은 채널이다.
3주 전쯤 해당 채널에서 '남녀갈등, 그리고 해결책'이라는 영상이 올라왔다.
(https://youtu.be/96EW9wXETwA?si=Nl9-xZiAIpyVi_FA)
심상치 않은 소재를 다루었음에 걱정부터 되었다. 영상의 결론은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자'라는, 상투적일지라도 틀린 말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댓글창이 막히고 사과문까지 올라왔다.
다수의 반응은 긍정적이고 영상 내용에 공감하는 댓글들이 많았다. 다만 극단적인 의견만을 강요하는 소수의 목소리가 무시할 수 없는 정도였을 것이다.
어느 유튜버가 내보인 선량한 진심이 공격받고, 그 공격이 도를 넘어서자 사과하게 되는 세상.
어떤 갈등에 있어서는 협력은 고사하고 소통마저 불가능해져 버린 것은 아닌지 안타까웠다.
트랙을 돌다 보면 분명 맞닥뜨리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기록이 정체될 때, 혹은 내가 올바른 자세로 뛰고 있는지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해야 할 수 있다. 하물며 부상을 당했을 때는 어떠한가. 도움이 필요한 순간도 있고 도움을 줘야 하는 순간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 트랙에서, 당장의 기록 갱신이 중요하니 성난 황소처럼 앞만 보고 달려 나가려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소통과 협력이 부재한 트랙에서 만약 슬럼프를 겪게 된다면 기록 갱신은 고사하고 어제의 나를 이기기도 어려울 테다.
운동은 막연히 자기와의 싸움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혼자만의 싸움을 하다가 지치면 스스로의 운동 신경을 문제 삼고 남들보다 의지가 약하다는 비관에 빠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시티 보이즈>가 보여주듯, 혼자 싸우기 어렵다면 남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도 얼마든 있었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는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값지다고도 하지 않나. 같이 뛸 수 있는 러닝 크루들도 많고 운동을 꾸준히 하는 친구들도 있다. 오늘부터는 함께 달려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