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결혼 일 년 전 식장예약 실화입니까
몰래 결혼박람회 다녀온 썰
주변에서 결혼을 준비했던 지인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다.
'식장부터 잡아라'
심지어 이 말은 남자친구가 없는 사람한테도 포함되어서 '그래도 일단 식장부터 잡고 남자친구를 만들면 된다.'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는데, 말의 요지는 코시국 때문에 결혼이 줄줄이 밀려 요즘 웬만한 식장은 대개 일 년 전에 예약이 다 차기 때문에 뭐가 되었든 식장부터 잡아놓으라는 반 우스갯소리다.
반 우스갯소리였다.
나한테 닥치기 전까지는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준비하는 친구가 날짜가 없어서 식을 반년이나 당겨서 급하게 진행하는 걸 보기도 했고, 아직 결혼이 일 년 넘게 남았는데도 미리 준비하는 커플들을 보면서 '이렇게 한가하게 있을 때가 아닌데' 싶은 마음이 종종 들었다. 주변 조언대로 식장예약부터 잡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부모님이 남자친구를 탐탁지 않아 하는 현재로서는 그게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일임을 잘 알기에 그렇다고 가만있기에는 남는 날짜에 얼렁뚱땅 진행하게 되지 않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저런 생각이 다 들었다. 그렇게 나날이 불안함에 침식당해 있지만 부모님과의 갈등상황에 지쳐 뭐든 다 때려치운 무기력한 상태가 지속된 어느 날, 남자친구 차를 타고 가다가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
"오빠 전화 오는데 안 받아?"
(우물쭈물하다가 받음)"... 여보세요?"
"네 안녕하세요~! 00 결혼박람회 신청해 주셔서 연락드렸습니다. (이하생략) 그럼 신랑님 성함과 신부님 성함은 어떻게 될까요?"
'그'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이란, 나랑 너무 안 어울리는 마치 직장인인 나한테 학생이라고 말하는듯한 이질감이 들었다. 남자친구 역시 처음으로 그 말을 듣게 된 당혹감과 나에게도 미리 말하지 않고 혼자서 몰래 신청한 결혼박람회가 하필이면 나와 함께 있는 타이밍에 플래너님께 연락을 받게 되어 나의 눈치를 살피랴 질문에 대답하랴 몹시 진땀 나 보였다. 그것도 스피커폰으로 차 안에 빵빵하게 울려 퍼지는 '신랑님', '신부님' 이라니. 겨울인데도 땀을 뻘뻘 흘리는 남자친구가 귀여워 보여 이런 모습에 내가 결혼을 결심했지 싶었다.
나 혼자서만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닌가 싶을 찰나에 이렇게 뭐라도 알아봐 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무척 예뻐 보였다. 아무것도 안 하고 준비 없이 보내는 시간들을 불안해하기만 했지 내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아서 결혼준비에 대해 알아볼 심적여유도 없었던 중에 이렇게 얼떨결에 결혼박람회를 가게 되었다.
난생처음 가본 결혼박람회는 생각했던 것보다 소박했다. 킨텍스의 전시회나 최근 이사할 때 방문해 본 가구 박람회가 운동장이라면 우리가 갔던 첫 결혼박람회는 교무실이었다. 아마 주최사에 따라서 규모는 천차만별이었겠지만 우리가 방문한 곳은 백화점에서 개최되는 지역 웨딩 박람회로 들어가자마자 입구에서 전시장이 다 보이는 홀이었다. 결혼박람회 신청예약은 SNS로 진행해서 랜덤으로 플래너가 매칭되는 시스템으로 이때 매칭된 플래너들이 각각 연락을 해주셔서 지정된 시간에 방문하면 된다.
약속된 시간을 얼추 맞추어 갔는데도 앞타임 상담이 밀렸는지 대기가 길어져 우선 신혼여행부터 상담을 받으라고 입구에 있는 직원이 안내해 주었다. 신혼여행이라니 아직 먼 나라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결혼박람회 오면 이것저것 다 있구나 싶어 평소 신혼여행지로 생각해 봤던 몰디브를 위주로 상담받아봐야지 싶었다. 그런데 상담해 주시는 분이 몰디브보다는 유럽이나 칸쿤위주로 계속 말씀해 주셔서 요즘은 그 동네를 많이 가서 그러는 건가 했으나 알고 보니 여행사에서 칸쿤을 전문으로 담당하시는 분이었다. 역시나 결혼박람회는 다들 본인의 니즈를 채우기 위해 나오는 곳임을 한 번 더 몸소 느끼면서 드디어 기다렸던 플래너님과의 상담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우리가 생각한 시기의 예식 가능 시간이 몇몇 결혼식장에 한 두 개는 있었다. 예식을 생각한 시기까지 약 9-10개월 남을 시점이라 거의 없지 않을까 싶어 불안에 휩싸였는데 막상 플래너님이 알아봐 주신 시간들을 보니까 아예 없는 건 아니구나를 눈으로 확인하게 되어 큰 안도가 되었다. 결혼박람회가 어떤 곳인지, 웨딩플래너의 역할을 무엇인지, 내가 하려는 지역에 어떤 예식장이 있는지 거의 모르고 있다가 얼떨결에 간 결혼박람회는 나의 의문에 많은 답을 해주었다. 드레스샵에서 나온 플래너님이라 해당 드레스샵이 어떤지도 모르고 당일날 덜컥 계약하는 건 아니다 싶어서 그때의 플래너님과 계약은 하지 않았지만 알려주신 식장 현황과 대략적인 가격대들, 스튜디오 선정할 때 보여주신 업체 몇 곳들을 보면서 결혼 준비에 있어 감을 잡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때 상담해 주신 플래너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어쨌거나 부모님과 갈등유발을 피하면서 나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몰래 다녀온 결혼박람회는 성공적이었다. 결혼식장 남은 시간대들과 날짜들을 보면 좋은 시간과 날짜는 거의 없어서 일 년 전에 식장을 잡아야 하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잔여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큰 수확이었다.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부모님께 좀 더 객관적으로 현 상황을 말씀드리면서 나 자신도 조급함을 조금 버릴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