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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여명 Sep 24. 2023

다섯 살 아이와 12시간 비행하기

본 조르노, 아이와 떠나는 이탈리아 여행

아뿔싸!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이른 아침, 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아이가 코를 훌쩍거린다 싶더니 몇 번이고 "엄마, 코가 나와요. 닦아주세요."를 반복한다. 설마, 여행 내내 감기에 시달리는 건 아니겠지? 약을 처방해 주시며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이시던 의사 선생님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래도 상황 봐서 필요하면 현지 병원에 꼭 가세요." 춥고, 건조한 비행기 안에서 최대한 아이의 컨디션을 챙겨줘야 할 의무가 생겼다. 큼지막한 캐리어 두 개를 부치고도 남편과 내가 이고, 지고 다니는 가방을 뒤적거리며 필요한 물건들을 미리 꺼내놓았다. 얇은 겉옷, 아이가 좋아하는 얇은 이불, 콧물약과 가장 중요한 마스크! 다행히 아이의 상태는 악화되지 않았고, 가벼운 콧물 외에는 꽤 좋은 컨디션으로 여행을 즐길 수 있었는데, 나는 그 일등공신이 단연 마스크라고 생각한다.     



아이와의 여행 팁.     

성인들에게도 마찬가지지만, 아이와 비행을 해야 한다면 마스크를 반드시 챙기기를 추천한다. 아이가 깨 있을 때라면 벗겨도 괜찮지만 아이가 잠들었다면 조금 헐겁게라도 마스크를 씌워주는 것이 좋다. 자는 동안 호흡기에 찬 공기가 들어가는 것만 막아도 감기 걸릴 확률이 크게 줄어든다. 우리는 아이가 잠들면 무조건 마스크를 씌웠고, 깨어있을 때도 불편해하지 않으면 마스크를 착용하도록 했다. 남편과 나는 크리넥스 가습 촉촉 마스크를 이용했다. (아이들용 가습기 마스크도 나오면 좋을 텐데.)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으로 향하는 우리 비행기는 아시아나 OZ561 편이었다. 비행시간은 약 12시간, 기내식은 세 번 나오는데 로마행 비행기의 경우, 유아용 기내식을 사전에 선택할 수 있었다. 선택지는 많지 않았지만 돌아오는 항공편의 경우 아예 메뉴를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에 꽤 요긴했다. 하지만 메뉴 구성은 조금 아쉬웠다. 닭고기, 파스타 등 맵지 않은 음식들로 구성을 해 놓았는데, 식성이 꽤 좋은 편인 아이도 비행 중에는 입맛이 없는지 거의 입을 대지 않았다. 오히려 성인용 기내식 메뉴 중에 따뜻한 국이 나와서 국에 밥을 말아주었더니 잘 먹었고, 세 번째 기내식 때도 유아용으로 나온 샌드위치보다 엄마, 아빠의 몫으로 나온 피자가 결과적으로는 아이의 입에 더 잘 맞았다. 성인용 기내식도 맵지 않은 메뉴들이 있으니, 굳이 유아식을 선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함께 나온 달달한 간식들은 중간중간 아이가 잘 먹어주었다.                          


만 4세 생일을 몇 달 앞둔 아이의 이번 비행은 네 번째였다. 두 번은 국내비행 그리고 세 번째는 괌이었는데 다행히도 아주 어렸을 때부터 비행을 힘들어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장시간 비행인 만큼 우리도 그동안의 비행 경험을 토대로 평소보다 꼼꼼하게 준비를 했는데, 혹시 필요한 분들이 있을까 해서 간단하게 설명을 덧붙인다.               


만 3-4세 아이의 장시간 비행 준비물     

1. 영상 플레이어: 패드, 노트북, DVD 플레이어 등 아이가 좋아하는 영상을 미리 다운로드하여서 준비해 놓는다. 아이용 패드를 아예 사용하지 않는 우리는 노트북에 영상을 챙겨갔는데, 최대한 어두운 기내 환경에서 보여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2. 유아용 헤드셋: '청력 보호 헤드폰'은 추천하지 않는다. 비행기 내부 소음이 생각보다 크기 때문에 볼륨의 최대치를 제한하는 헤드폰은 오히려 영상을 볼 때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아이가 불편해할 수 있다. 물론, 청력 보호 기능이 없는 헤드폰을 사용할 경우 아이에게 영상을 보여줄 때는 반드시 볼륨을 체크하고 씌워주어야 한다.     

3. 클레이: 만 3세 아이가 비행기 안에서도, 호텔에서도 제일 잘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었다. 작은 사이즈의 클레이를 색깔별로 몇 개 챙기면 만들 때도, 만든 후에도 좋은 놀잇감이 된다. 단, 좁은 기내 안에서는 클레이 만들기가 쉽지 않으므로 클레이 트레이를 꼭 챙기기를 추천한다. 모형틀과 조각칼이 있으면 도움이 되는데, 조각칼은 기내 반입이 안 될 수 있어서 우리는 작은 자를 챙겼다.     

4. 간단한 워크북: 비행기에 탑승하면 아시아나에서 얇은 워크북과 작은 색연필 세트, 스티커북을 어린이 탑승객에게 선물로 제공한다. 이륙도 하기 전에 아이가 흥미를 잃어버렸다는 게 문제지만^^;; (그래도 감사합니다!) 깎아야 하는 색연필 말고 돌려쓰는 색연필과 사인펜, 풀 등을 챙기면 기내에서도 간단한 활동이 가능하다.      

5. 마스크, 간단한 간식거리, 얇은 옷가지, 양말: 춥고 건조한 기내 공기를 피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마스크. 인터넷에 보면 기내가 건조해 휴대용 가습기를 가지고 타도 되느냐는 문의가 많은데, 항공사마다 규정이 다른 것 같다. 그보다 더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마스크 착용이다. 아이는 비행 내내 거의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고 - 아이가 불편해하지 않았다. - 덕분에 컨디션 조절도 잘할 수 있었다. 기내 안으로 가지고 탄 고구마말랭이는 식사 대용으로도, 간식으로도 최고의 간식거리였다. 아이의 옷은 기본적으로 가볍게, 대신 쉽게 입고 벗길 수 있는 얇은 외투를 꼭 챙기기를 추천한다. 기내에서 성인용 슬리퍼는 제공되지만 아이의 몫은 없으므로 아이 양말을 챙겨 실내화 대신 신기는 것도 도움이 된다.     

6. 사탕, 젤리 등의 간식: 이륙할 때 아이가 귀가 불편해할 수 있다. 작은 사탕을 물고 있으면 도움이 되기 때문에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준비해 두면 좋다.     

          

비행기를 타고 먼 여행을 떠날 때의 특별한 설렘은 아이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다. 이코노미 좌석이 좁고 불편할만한데도 아이는 테이블을 접었다, 폈다 해가며 조물조물 클레이도 만들고, 종이접기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저기 안전벨트 모양에 불이 꺼질 때만 벨트를 풀 수 있어." 안전벨트 표시등을 보며 설명을 해주니 표시등이 바뀔 때마다 아는 척을 한다. 좁은 통로를 지나 화장실 앞에서 아빠와 스트레칭도 하고 오고, 간식거리가 잔뜩 든 첫 번째 기내식을 신나서 구경하고, 좋아하는 영상을 몇 편 봤는데도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아이가 그제야 묻는다. "엄마, 여행은 언제 해요?" 비행을 시작한 지 6시간 정도가 지난 상황이었다. 좌석 모니터에 비행기가 움직이는 영상을 보여주며 아이의 작은 손을 붙잡고 여행에 대한 설명을 해준다. 아이는 지루한지 몸을 베베 꼬다가, 연신 하품을 하다가 곧 졸리다며 잠이 들었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 앉아 머리는 엄마 다리 위에, 두 다리는 아빠 다리 위에 올린 채로. 무려 이코노미 석에서 누워 자는 호사라니! 아이가 머리를 올려놓은 다리가 슬슬 저리기 시작하지만, 아이의 뒤척거림이 더 마음에 쓰인다. 꼬물꼬물, 그래도 많이 불편하겠지. 연신 뒤척이는 아이의 이마를 쓸어주었다가 손과 다리를 주물러주었다가, 이불을 덮어주었다가를 반복하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욕심이 아이를 고생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그때, 아이가 찬 이불을 다시 덮어주던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남편이 살며시 안쓰러운 미소를 짓는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듯이.  

             

이번 여행의 비행기 티켓은 그동안 우리가 모아 온 마일리지를 이용해 구입한 것이었다. 12시간 비행을 앞두고, 남편은 여러 번 나에게 비즈니스석을 끊을지를 물어보았었다. 물론,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우리 두 사람보다도 아이가 힘들지 않게 하려면, 아무래도 비즈니스 석이 낫지 않을까? 인스타그램의 수많은 인플루언서들은 어쩜 그렇게 하나 같이 비즈니스석을 잘만 타고들 다니는지. 누가 봐도 널찍한 비즈니스 석을 하나 다 차지하고 앉아 패드를 보고 있는 '남의 집 아이' 사진을 떠올렸던 것도 사실이었다. 별 다른 고민 없이 아이에게 비즈니스 석 티켓을 척척 끊어줄 수 있는 부모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잠든 아이의 뒤척임이 못내 더 미안한 마음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엄마로서 나의 생각은 명확하다.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의 '편의'가 아니라 '기억'이라는 것.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에서는 수많은 요소와 선택들이 아이를 우선순위로 고려하겠지만 우리가 아이에게 남겨주고 싶은 것은 편안한 비행, 화려한 숙소, 불편함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편안한 여행이 아니라, 엄마, 아빠와 온전히 함께한 기억으로서의 여행이었다. 이 지점에서 우리 부부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우리는 좁은 이코노미 석에서 함께 놀이를 했고, 함께 창밖을 내다보았으며, 살갗을 마주하며 함께 식사를 하고, 어깨를 내어주고, 다리를 내어주며 쪽잠을 청했다. 그 불편하지만 따스한 기억이, 아이의 기억 속에 오래오래 남을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아이를 깨우지 않으려고 저린 다리를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나를 보며 연신 "괜찮아?"를 묻는 남편과 기꺼이 "괜찮아."라고 대답할 수 있는 아내. "이쪽으로 조금 더 와." 조금이라도 더 몸을 웅크려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려는 남편과 "나는 괜찮아, 여보가 이쪽으로 더 와."라고 말할 수 있는 아내. 그 사이에 엄마, 아빠를 바라보는 아이가 앉아있다.                


아이는 12시간의 비행 동안 생각보다 영상을 많지 찾지 않았고, 우리는 함께 자고, 함께 먹고, 함께 남은 시간을 확인하며 셋이 하나처럼 붙어 있었다. 모든 순간이 편할 수는 없어. 매 순간 최고의 것만을 누릴 수는 없어. 하지만 우리가 가족인 이유는, 우리가 여행하는 이유는 함께이기 위함이므로 결코 불편하지 않았던 12시간. 결코 쉽지 않았을 그 시간을 아이가 버텨내 준 데에는 엄마, 아빠의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굳게 믿는다.                


콧물 약을 두 번 먹고 도착한 피우미치노 공항에서 아이의 컨디션은 신기하리만치 좋아져 있었다. 12시간 비행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가족이 이렇게 밀착해서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12시간은 결코 흔치 않다. 내 아이의 숨소리를 바로 옆에서 느낄 수 있는 12시간. 부드러운 살결과 뽀얀 얼굴, 아직 희미하게 남은 아기 냄새가 코끝에 닿는 시간. 아빠는 아빠로서, 엄마는 엄마로서, 너는 딸로서 온전히 서로를 배려하며 함께 한 시간. 함께, 안전하게,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비행할 수 있어서 더없이 행복했던 시간.      

          

비행기가 안전하게 땅에 닿자, 아이가 박수를 친다. 와! 도착했다! 12시간 비행에 필요한 수많은 준비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의 마음을 살피는 일. 우리는 또다시 너를 통해 배우고, 너를 통해 성장한다. 12시간 비행, 까짓 거 뭐 별 거 아니네! 이제 웬만해서는 그 어떤 장거리 비행이 두렵지 않게 된 것도 덤으로 얻은 용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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