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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여명 Sep 26. 2023

로마에서 아이가 가장 먼저 한 일

본 조르노, 아이와 함께 떠나는 이탈리아 여행 

비행기가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 도착한 지 몇 분 되지 않아 나는 그만 아이에게 짜증을 내버렸다. 12시간의 긴 비행을 뒤로하고 비행기에서 드디어 내리나 싶었는데, 입국 심사도 받아야 하고 - 아이 동반 혜택으로 패스트트 트랙으로 비교적 빠르게 통과하긴 했지만 - 짐도 찾아야 하고, 렌터카도 받아야 하고, 5살 아이로서는 분명 쉽지 않은 기다림이었으리라. 더욱이 추울 정도로 에어컨이 '빵빵'한 대한민국의 공공시설에 익숙해진 우리에게는 '에어컨이 고장 났나...?' 생각이 들 정도로 덥고, 습한 피우미치노 공항의 환경이 쉽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안 그래도 땀이 많은 아이의 작은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있다.


아이는 비행기에서 내릴 때부터 갖은 요구들을 이어오고 있었다. 짐을 찾고, 예약해 놓은 렌터카를 픽업하기 위해 공항을 둘러보던 중, 나는 결국 아이에게 한 소리를 하고 말았다. 엄마, 아빠의 작은 표정 변화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아이는 금세 풀이 죽어 슬금슬금 엄마 눈치를 본다. 아휴, 사람은 이렇게나 어리석다. 비행기에서 내리기만 하면 12시간이라는 비행을 함께 해 준 아이에 대한 고마움을 넓은 아량과 인내로 갚겠다 다짐했건만. 참을 거면 끝까지 참을 것이지, 결국 아이에게 짜증 섞인 말을 내뱉고야 말았으니. 물론, 나에게도 이유는 있었다. 비행기 모드를 해제하자마자 일과 관련해 지금 당장 처리할 수 없는 업무를 닦달하는 메시지가 연달아 쏟아졌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육아란 언제나 아이의 컨디션이 아니라 나의 컨디션에 따라 좌우된다. 생각해 보면 아이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기다림의 시간을 성실하게 견디는 중이었다. 결국, 엄마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게 문제였던 셈이다.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잠깐 구름이 걷힌 상태였다. 엄마에게 혼나고 뾰로퉁한 아이.


언제 사과를 하지.... 타이밍을 찾고 있던 중에 피우미치노 공항 근처에 위치한 첫 번째 숙소에 도착했다. 어느덧 로마의 해가 조금씩 기울어가는 시간이었다. 긴 비행의 피로를 풀 목적으로 첫 숙소를 찾다가 눈에 띈, 예쁜 테라스가 달려 있고, 길만 건너면 큰 쇼핑몰이 있는 아파트먼트였다. 짤랑거리는 열쇠꾸러미를 손에 들고나니 로마에 온 것이 비로소 실감이 난다. 그렇지, 유럽 숙소에 열쇠가 빠질 수 없지. 삐그덕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 이탈리아에서 엘리베이터가 달린 숙소를 구하는 일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 올라가 열쇠구멍에 열쇠를 넣고 문이 열리자마자 아이가 "와아!"하고 소리를 지르며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엄마,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아늑한 거실과 침실, 깨끗한 화장실, 귀여운 주방을 차례로 둘러보던 아이는 맨발로 발코니에 나가 점프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 덥고, 졸리고, 기다리는 게 얼마나 힘들었겠어. 미안해, 아가야. 아이의 마음은 어느새 마법처럼 스르르 풀려 있었다.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 근처의 아파트먼트는 안락하고, 깨끗했다. 공항 근처 하루 묵어갈 숙소로 추천. 예약은 Booking.com


하지만 부모들이여, 방심은 금물이다! 자고로 딸을 키운다는 것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뒤바뀌는 감정에 대응하는 일인 법. 간단히 짐 정리를 마치고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사러 나가자 하니, 피곤하다고, 자기는 숙소에 있겠다며 짜증이다. 저녁도 먹어야 하니 아이를 달래 간신히 나오긴 했는데, 장을 보는 내내 대답도 없이 입만 잔뜩 내밀고 있다.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핑크색 요술봉 같은 장난감을 사겠다길래 - 불빛도 나고, 뾰로롱 소리도 나긴 하지만, 분명 저런 건 다이소에서 봤단 말이다! - 단호히 안 된다고 했더니 더 짜증이다. 진열대에 가득 한 햄이며, 치즈며, 살라미며 눈은 돌아가지, 아이는 짜증을 내지, 고민하던 나는 결국 장난감 코너로 카트를 돌렸다. 그래, 사자. 6유...로, 그래 뭐, 까짓것, 네가 즐거우면 됐지. 핑크색 요술봉과 공주 캐릭터가 그려진 요거트를 카트에 넣고서야 아이도 기분이 조금 풀린 듯하다. 마트 앞에 동전 넣고 타는 놀이기구는 만국 공통어쯤 되는지, 결국 우리도 피하지 못하고 장을 보고 남은 동전으로 아이에게 놀이기구를 태워주었다. 아이가 웃기 시작했다. 좋았어! 바로 지금이야. 저녁에 먹을 피자, 파스타를 사러 가자!

그래, 너도 우리의 여행 메이트니까. 네가 하고싶은 걸 할 권리가 있지!

숙소에 돌아와 투고 박스에 담긴 피자, 파스타를 챙겨 테라스로 나갔다. 올리브를 좋아하는 아이는 쏟았나 싶을 정도로 올리브가 많이 뿌려진 피자를 골랐는데, 보기에는 투박한 게 어찌나 맛이 있던지! 아이는 테라스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피규어들을 늘어놓고는 "여기서 먹으니까 재미있어요!"라며 깔깔깔 웃는다.


어쩌면 여행은 사서 고생하는 일. 낯선 곳에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 앞에 기꺼이 에너지를 쏟는 일.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은 더욱더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기꺼이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글쎄, 언젠가 우리 부부에게 우리 둘만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더 편하고, 덜 수고로울 수 있겠지만 우리는 기꺼이 아이와 함께 떠나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행복해하는 아이의 미소 하나면 수 백 가지 요구사항으로 엉덩이 붙일 틈이 없던 하루의 수고가 싹 잊히는, 다섯 살 아이와 단단히 사랑에 빠지게 된 바보들이라서 그렇다. 우리의 사랑은 손해 볼 때도 꽤 많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함께할 때의 행복은 우리가 더 큰 것 같다. 이 요상한 부모 됨의 비밀을 반드시 풀어내고야 말겠다.

마트에서 사 온 음식들로 우리는 다음날 아침까지 예쁜 테라스에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요거트 하나가 맛이 독특해서 파파고 번역의 도움을 받아보았는데...음, 그렇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아이가 여행 중에 갖고 싶어 하는 작은 장난감들에 조금 더 관대해지기로 했다. 아이는 아이의 시선으로, 아이의 관점에서 여행을 즐기면 된다. 적당한 선에서 아이가 원하는 일들을 기꺼이 허용해 주는 것. 일상에서의 규칙을 조금 풀어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엄마, 아빠와 여행하는 일에 마음을 열어준다. 귀국 전 이틀을 더 보낸 로마에서 우리가 - 로마까지 와서! - 그 수많은 유적지를 기꺼이 포기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아이는 엄마, 아빠를 따라온 게 아니라 '함께' 여행하고 있는 것이므로. 아무튼 그래서, 이탈리아 여행 중에 연우가 산 수많은 물건들은 한 데 고이 모아 다시 이야기해 보기로 한다. 


저녁을 먹고, 남편은 다시 피우미치노 공항으로 향했다. 사실, 우리의 여행에는 또 한 명의 메이트가 있었으므로! 기상악화로 런던에 한참이나 발이 묶여있던 바로 '그 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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