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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현재 Mar 30. 2024

01 여행과 거주의 차이

"휴직했습니다. 체코에 살고요."

 처음으로 해외 생활을 꿈꿨을 땐 대학생이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해외 생활을 하기 위해서 우선 돈이 필요하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학기 중에 수업 시간을 피해 짬짬이 하느라 큰돈을 벌 수는 없었고 이외의 수입은 용돈이 전부라 결국 부모님의 도움이 절실했는데, 부모님의 눈엔 마냥 걱정만 되는 여자애를 혼자 해외에 보낼 수 없었던 두 분은 교환학생이라는 조건을 내놓으셨다.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협약이 체결된 학교의 보호가 있을 것이고, 학점과 연계된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마냥 풀어지지도 않을 수 있는 적당한 조건. 교환학생에 합격한다면 해외에 나가는 것을 허락해 주겠다는 말씀 이후로 열심히 토플 공부를 해서 홍콩으로 한 학기 동안 파견을 다녀왔다. 그런데 웬걸. 그렇게 원하던 해외 생활이었는데 학기 첫날 오리엔테이션을 듣고 돌아온 기숙사에서부터 마음이 바닥을 쳤다. 결국 한 학기 내내 향수병으로 고생하다가, 파견 기간을 1년으로 신청하지 않은 과거의 나 자신을 기특해하며 기말고사 시험이 끝나자마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런 내가 떠올리는 홍콩은, 여행으로 같은 곳을 다녀온 친구들이 떠올리는 홍콩과는 마음에서 매기는 행복지수가 다르다. 어떤 장소든 여행을 목적으로 잠시 거쳐가는 것과 장기간 머무르며 생활을 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체코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홍콩을 떠올린 건 그 때문일 것이다. 며칠만 잠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리 잡고 살아야 하니까. 살다 보니 유명한 관광지를 중심으로 좋은 것만 보고 아낌없이 지출하며 다니는 여행이었다면 크게 불편하지 않았을 것들이 보였다. 평일 저녁 여섯 시가 지나면 대형 쇼핑몰이나 글로벌 체인 브랜드를 제외한 체코의 웬만한 가게들은 셔터를 내린다. 심지어 일요일에는 아예 영업을 하지 않는 곳들도 많다. 한국에서는 보통 주말을 이용해 필요한 외출과 쇼핑을 했던 터라 토요일엔 일찍 문을 닫고 일요일에 문을 열지 않는 유럽의 상점에 적응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또, 배달 앱을 열어도 배달되는 음식들의 종류가 한정적이라 먹고 싶은 메뉴가 배달 앱에 있을 때가 아니면 배달 주문을 할 수 없었다. 만약에 온라인으로 물건을 주문하면 보통 2주 정도 기다려야 한다. 어젯밤에 주문한 물건을 오늘 새벽에 배송받는 배달의민족에게는 어마 무시한 속도다. 그저 불편한 것 투성이라고 여겨지는 탓에 대체 유럽의 어디가 환상적이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처음엔 어색하고 불편했던 것들이 체코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몰랐던 것들이 보이는 덕에 점점 익숙해졌다. 이곳은 주말이나 휴일은 가족과 함께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라 빨리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했다. 누구도 왜 여섯 시에 영업을 종료하냐고 따지지 않았다. 영업시간을 늘려달라고도. 각자가 가정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존중하는 것이다. 1년쯤 지내고 나니 늦게까지 영업을 하는 곳을 발견하면 다들 집에 갈 텐데 영업은 잘 되나 걱정이 될 정도였다. 또, 코로나 이전까지는 배달을 많이 시켜 먹지 않아서 우리나라만큼 배달 문화가 보편화되어있지 않았었지만, 코로나를 겪은 이후부터 배달 앱이 많이 성장해서 패스트푸드에서부터 포케나 쌀국수까지 웬만한 음식들은 다 배달이 될 만큼 메뉴도 다양해지고 있으며 배달 업체도 여러 개다. 유럽에서 온라인으로 물건을 주문하면 배송 중에 분실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데, 체코는 그래도 무사히 받는 편이니 만족스럽다고 할 수 있다. 직접 못 받는 경우를 대비해서 택배 대리 수령점으로 운영되는 가게들도 꽤나 많다.


 어느 순간부터 조금 불편하더라도 '이게 바로 유럽 생활의 맛이지!'라고 받아들이게 됐달까. 초반에는 아직 여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적응하는 단계라 생각하고 받아들였고, 1년이 넘어가고부터는 이제 머지않아 떠나게 될 테니 괜찮다며 받아들였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이게 꼭 유럽이라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30년 넘게 한국에서 살던 사람이 고작 2년밖에 살지 않은 곳에서 문득문득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닌가. 유럽이 아니라 미국이나 호주, 아니면 한국과 가까운 아시아의 다른 나라였더라도 말이다. 내가 한국에서 살며 이런저런 일들을 겪었던 30년 넘는 시간 동안, 이 나라 체코에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으며 그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았고 사람들은 어떤 주제로 소통을 하고 지냈는지를 전혀 모른다. 체코 아닌 유럽의 다른 나라, 미국, 호주, 아시아 어떤 나라였더라도 미리 공부하지 않는 한 알 수 없다. 그런 사회적인 배경들과 우리나라와는 다른 문화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내가 익숙한 방식대로만 이해하려 한다면, 그건 이방인인 내 잘못이다. 홍콩에 있을 때는 어리석게도 이 이치를 깨닫지 못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하다 보니 익히 알고 있던 것들이 그리울 뿐이었다. 낯선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다 튕겨내 버렸기 때문에 점점 더 외로워졌었다. 결국 나를 외롭게 만든 건 익숙하지 않은 환경이 아니라 그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나 자신이었다. 며칠 머무는 여행지라면 '에잇, 별로네.' 아니면 '좀 참지, 뭐.'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한 달을, 일 년을 살아야 한다면 주변 환경을 포용할 수 있는 자세여야 했다. 무조건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다른 곳에서 살기로 선택했고, 살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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