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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현재 Apr 12. 2024

02 대륙에 도착한 반도인

"휴직했습니다. 체코에 살고요."

 "내일 폴란드로 출장 가. 차로 한 시간 정도?"

 자동차로 운전을 해서 다른 나라에 갈 수 있다고? 유럽이라는 대륙에 왔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남편의 회사는 체코와 국경을 맞댄 폴란드와 슬로바키아에도 지사를 두고 있어서 가끔 업무 목적으로 이웃 나라에 출장을 간다. 분명 사용하는 언어와 화폐단위까지 다른 나라로 가는 일인데 비행기가 아닌 자동차로 닿을 수 있고, 국경을 지나갈 때 여권을 보여주는 등의 수속 절차도 없다니. 우리나라 경상북도에서 경상남도로 지역을 넘어갈 때 "경상남도"라고 적힌 표지판을 지나치듯이, '여기부터 폴란드입니다'라고 적혀있는 표지판을 넘어가기만 하면 체코에서 폴란드로 이동하는 것이다. 여태까지 국가 영역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비행기나 배를 타야 했던, 섬과 다를 바 없는 반도 출신에게는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국경이 맞닿은 여러 국가 간에 사람, 상품, 자본, 서비스 등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한 둘도 아닌 27개나 되는 국가들이 연합해 있다는 것이 익숙한 듯 생소했다. 나라라는 개념도 잘 모르던 어린 시절부터 뉴스를 통해 '유럽연합' 혹은 'EU(European Union)'이라는 단어들을 들어왔기 때문에 익숙했고, 한편으론 비행기를 타고 이웃나라에 혼자 다녀올 수 있을 만큼 컸을 때에도 한 국가 안에서만 수 십 년을 살다가, 나라들끼리 격의 없는 친구처럼 지내는 것을 이제야 겪어 보다니 생소했다. 유럽에 살면서 왔다 갔다 해보고 나서야 어쩌면 이들이 지금처럼 어느 정도의 약속을 정하고 함께 지내는 것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넓은 고속도로로도, 좁은 시골길로도 이어져 있고, 다리 하나만 건너면 걸어서 갈 수도 있는 옆 나라인데, 건너가기도 하고 건너오기도 하면서, 도움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면서 지내면 서로에게 더 좋을 거라는 생각을 이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하고 진작에 제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 덕에 남편의 회사는 체코에 본진을 두고 있으면서 경제적, 물리적 효율을 높이기 위해 폴란드와 슬로바키아에도 영업장을 두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독일에서 직장을 다니면서 폴란드에 사는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주말마다 운전대를 잡는다. 나라가 아닌 대륙이 생활권에 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대가 생소하게 느껴졌던 건 이전까지는 선을 긋고 테두리 안의 같은 것과 테두리 밖의 다른 것을 구분하려 했던 나의 속 좁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전까지는 더불어 사는 것에 '굳이?'라는 의문을 던졌었다. 너는 네가 가진 것만큼 누리고 나는 내가 가진 것만큼 누리고, 남에게 부탁을 하지도 않고 받지도 않으면 마음 편할 텐데, 굳이 조금이라도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이 불편했다. 부탁을 받으면 기꺼이 들어주기는 했지만 반대로 먼저 나서서 뭔가를 요청하지는 않았고 직접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어쩔 수 없다 여기고 넘어가버렸다. 하지만 모국에 살았다면 인터넷에 검색을 하든 관공서에 전화해서 물어보든 해서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을 여기에선 혼자서 해결하지 못해서, 영어로 소통할 수 있는 체코인이나 먼저 자리 잡고 살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도와달라고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부탁을 하면서도 괜히 신경 쓰이고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뻘쭘하기도 했었지만 혼자만의 기우일뿐, 아무도 눈치를 주거나 귀찮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두들 흔쾌히, 어찌할 줄 몰라 양쪽 눈꼬리가 한껏 쳐진 어린양을 한껏 '오구오구' 해주었다.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지내다가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생길 때면 신나게 팔을 걷어붙였다.


 여기에서 만난 언니들과 몇 번의 부탁과 도움을 주고받고 나서야 나의 부족한 부분을 네가 채워주고, 너의 부족한 부분을 내가 채워주며 함께 사는 맛을 알았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 사람마다 관심사, 알고 있는 지식, 잘하는 분야, 능력치도 다르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데, 어떤 일을 할 때 잘하고 못하는 것들을 서로 채워주면 확실히 혼자 하는 것보다 나을 테다. 해외에서 혼자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어려운 일이 생기더라도 같이 길을 나서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용기가 나기도 하고 그 용기로 직접 부딪혀 알아보든 머리를 맞대서 방법을 찾아보든 해서 풀리기도 하더라. 또, 체코 뉴스를 직접 볼 수 없다 보니 놓치게 되는 소식이나 현지 학교의 이야기 혹은 지역 축제 일정들도 사람들의 '카더라' 통신으로 주고받기도 한다. 주변 한국인이나 남편의 회사 동료 등을 통해 여러 소식을 전달받다 보니 해외에서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커뮤니티가 발달하게 되는 이유를 알만 했다. 능숙하게 소통할 수 있는 언어로 많은 정보들이 모이기도 퍼져나가기도 하는 곳이었다. 가끔 한국에 갔다가 오는 사람들이 있으면 여기에선 살 수 없는 한국 물건들을 나누어 주시기도 한다. 약소하다는 말과 함께 전해주시지만 얼마나 소중한 마음인지 알기에 전혀 약소하지 않음을 안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나에게 좋은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고 나쁜 것은 역시나 나쁠 것인데, 이왕이면 내 옆에 있는 사람도 나도 우리 모두 좋다면 기쁨이 배가 되지 않을까. 엄청나게 많이는 아니더라도 나만큼 이나마 상대방이 누렸으면 하는 마음에 콩 한쪽이라도 나누다 보면 서로의 삶이 조금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서로 윈윈 하기도 하고, 쓰러질 땐 의지해서 일으켜 세워주기도 하고, 그러면서 함께 하는 이에 대한 마음도 돈독해지고. 연합(Union)이라는 이름으로 연대하는 대륙(Europe)은, 같이 하면 더 큰 행복을 누릴 수 있는데 그걸 모르고서 혼자 뻣뻣하게 지내려 했던 나를 되돌아보게 했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삶을 윤택하게 사는 방법 중에 하나인데 왜 여태 마음을 열지 않았던 것인가. 내어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면서 이 시간과 공간과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란, 손을 잡고 나아가는 것이란 이렇게나 좋은 것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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