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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현재 Apr 26. 2024

03 체코어를 배운다는 것

"휴직했습니다. 체코에 살고요."

생존을 위해서는 기본적인 언어를 습득해야만 했다. 스스로 말하지 못하고 자기표현을 할 수 없으면 경기뿐만 아니라 일상생활도 어렵다. 언어는 기회를 제공하는 발판이고, 그 나라에 대한 존중이며, 모든 것의 시작이다.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손웅정 저, 수오서재 출판)
[기회의 신] 중에서

 손흥민 선수의 부친 손웅정 감독이 본인의 에세이에 위와 같은 글을 남겼다. 그 나라의 언어로 소통하는 일의 중요성을 알았던 부친 덕에 손흥민 선수는 본인이 몸담았던 독일과 영국의 언어를 배워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손웅정 감독님의 책을 읽고 손흥민 선수가 현지 언어로 진행하는 인터뷰 영상 등을 보면서 언어를 알아야 문화를 알고 속해 있는 시스템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머리로는 알면서도 깊이 와닿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해외 생활을 하며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알게 됐다.


 체코어는 체코 생활 2년 내내 가장 큰 장벽이었다. 알파벳과 유사한 문자로 적혀있다는 사실 말고는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는 전공자가 아닌 이상 체코어를 제2외국어로도 잘 배우 지를 않지 않는가. 그래서인지 체코에 오기 전에 인사말이라도 익혀둘까 싶어 수업을 검색해 보아도 검색 결과가 그리 많지 않았고, 그나마 찾은 것 중에서 내 상황과 조율하여 배울 수 있는 학원이나 수업이 없었다. 아쉬운 대로 체코어 독학 교재 한 권만 덜렁 들고서 바다를 건너왔다. 다행히(?) 구글 번역기를 통해 간단한 번역과 통역 정도는 가능했는데 그 덕인지 여기서 만난 한국인 중 그 누구도 체코어를 '굳이'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소통하는 일이라고는 식당에 가서 밥을 먹거나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뿐인데 그 정도는 대략적인 손짓 발짓 그리고 간단한 영어로도 가능했다. 프라하에서 학교를 졸업해서 체코어가 능통한 친구를 만나 체코어를 공부에 대해 물어봤을 때도 '굳이' 추천하지 않았다. 체계가 복잡해서 배우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닌 데다가, 본인이야 학교생활을 하고 수업을 들어야 했기에 눈물을 흘리며 공부했지만 나 같은 경우는 2년이 지나 한국으로 돌아가면 전혀 쓸 일이 없을 언어로 인한 고생길을 추천하지 않는다 했다.


 그래도 배우고 싶었다. 아무리 간단한 의사표시라도 앱을 통하지 않고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학원을 검색하다가 다행히 커리큘럼에 대한 후기가 좋은, 외국인들에게 영어로 체코어를 가르쳐 주는 수업을 찾았다. 90분짜리 수업을 일주일에 두 번씩 들으면서 인사말, 자기소개, 음식, 숫자, 색깔 등 다양한 주제들을 배웠고 '스스로 간단한 의사표시하기'라는 초기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목표를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쓸 수 있는 단어들을 최대로 끌어모아 모아서 체코어로 직접 식사 예약을 한 덕이다. 예약을 위해 식당에 전화를 걸었는데 수화기 너머의 상대방이 영어는 할 수 없다고 답했을 때 한순간 캄캄해진 눈앞을, 한 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밝힌 후에 깊은 심호흡을 하고서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원하는 날짜, 시간에 예약을 잡고서 "Děkuji, nashledanou!"(=Thanks, Bye!) 하고 전화를 끊었을 때는 어찌나 흥분되던지 상기돼서 붉어진 볼 위에서 계란 프라이도 부칠 수 있을 것 같았고, 두근대는 심장소리가 귀에 들릴 것만 같았다.


 10년 넘게 외국어로 배운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 나라에서 영어로 소통할 수 없는 경우에, 외국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돌아서거나 현지 언어로 소통이 가능한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포기하거나 부탁할 수는 없다고 여겼다. 이곳에서 사는 데에 필요한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은 이 나라에 대한 존중이기도, 내 생활에 대한 욕심이기도 하다. 대충 눈치로 이런 말인 것 같아서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싫었다. 정확히 무슨 뜻인지 이해한 다음에 긍정을 하든 부정을 하든 하고 싶어서 공부했다. 몇 개월 조금 배웠다고 해서 체코어로 프리토킹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원하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단어도 찾아봐야 하고 머릿속에서 문장을 만들어 입 밖으로 내뱉기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어느 정도의 듣기가 가능해지고 나니 어쨌든 이 언어를 배워서 많은 이득을 본 사람은 언어를 배운 스스로임을 깨닫게 되었달까. 영어로 소통할 수 없는 택시 기사님께 여기 세워주시면 걸어서 갈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고, 마트 쿠폰 사용 방법을 설명해 주는 직원의 말을 이해할 수 있고, 식당에 식사 예약 전화도 할 수 있고! 혼자 하고 싶다는 욕심에 시작했지만 다른 이의 통번역 도움 없이 혼자서 일상생활이 가능해지는 만큼 체코라는 나라에 대한 마음의 거리도 가까워졌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는데, 체코에서 체코어로 살아가는 일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만약 독일에 살았다면 독일어를, 프랑스에 살았다면 프랑스어를 배웠을 것이다. 한 번은 체코 그릇을 사러 가게에 들어갔다가 사장님과 스몰토크를 나누었는데,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스스럼없이 모르는 가게에 들어가는 것부터 체코어로 스몰토크까지 나누기까지 주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언어가 익숙해지는 만큼 이 나라에 대한 낯가림이 덜어졌다. 체코어를 배우지 않은 채로 그저 사는 기간이 길어지기만 해도 익숙해지기 마련이겠지만 그래도 언어를 익히는 일은 낯선 나라와 낯가리는 시간을 단축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휴직 기간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더 이상 이 언어를 쓸 일이 없을지라도, 시간이 흘러 간단한 인사말조차 다 잊게 되더라도, 내가 사는 곳의 언어를 배우는 일의 장점은 확실히 누렸다. 어디를 가든 의사소통이 편해졌으며 그렇게 언어를 통해 체코라는 나라에 한걸음 가까이 접근해 본 것이 팍팍할지 모를 해외 생활을 조금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고, 이곳을 나의 제2의 고향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어 줄 수도 있다(물론 제2의 고향은 되지 못했다). 몰랐던 언어를 익히고 낯선 문화에 가까워져 본 적이 있다는 것은 시간이 오래 지난 어느 먼 훗날 이곳을 잊더라도 살아가는 동안 언젠가 한 번쯤은 이런 경험들이 자산으로 남아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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