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 우리 모두에게 큰 박수를 보내며.
연말이 되면 꽤 분주해진다. 새해 다짐했던 계획의 결실을 위해, 아득히 멀리 있는 목표 지점을 향해, 비슷한 모양으로 매듭을 지으려 달리고 또 달린다. 동시에 분주해지는 나의 마음. 그저 (늘 그랬던 것처럼) 내일을 맞이하는 것인데. 달력의 새로운 장을 넘기듯 과거의 종이를 찢어내는 것인데. 2023에서 2024로 딱 한 글자 바뀌는 것인데.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뭐가 그렇게 겁이 나서 맥박 뛰듯 동동 마음이 분주해지는 것인가.
다행히도 올해는 세운 계획이 몇 없었다. 이십오 년의 시간을 지나면서 처음으로 계획도 다이어리도 없이 해를 시작했다. 그렇기에 겁은 많았고 두려움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빈둥대며 게으른 내 모습은 참을 수 있어도 게으른 꿈은 참을 수 없는 것을. 올해는 나에게 이미 진 채로 달력을 넘겼다. 남들보다 한 걸음 아니 몇 걸음은 더 물러선 채로 시작했다. 정말 그런 줄 알았다. 연말이 되기 전까지도 꼭 그런 줄만 알았다.
모두에게 같은 시간이 주어진다고 해서 우리의 목표와 계획도 동일하진 않다. 그렇게, 물러선 것도 진 것도 아닌 채로 연말이 왔다.
계획이 없어서 주어지는 모든 상황에 감사할 수 있었다. 새로이 만나는 인연에 설레고 떠나가는 이에게 최선을 다해 손 흔들어줄 수 있었다. 조금은 너른 마음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부족함은 부족한 채로 미숙함은 미숙한 채로 남겨두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게 됐다. 그냥 그러기로 다짐했다.
난 분주할 때마다 정리를 한다. 이부자리를 탁탁 털고, 방을 모조리 뒤엎고 먼지에 덮인 채로 허허 웃는다. 간질간질 코에 쌓인 먼지 덕에 아파트가 떠나가라 재채기하다가 누가 들었을까 두 손으로 입을 막고 한참을 웃어 삼킨다. 삼킨 것이 먼지인지 웃음인지 몰라도 그냥 웃어넘긴다. 정리를 마치면 빨랫거리가 방 한구석을 차지한다. 그것들을 다 모아 큰 바구니에 담고 빨래방에 갈 수 있는 날을 일정에서 골라본다.
드디어 빨래방에 왔다. 미루고 미루다 내년이 되어 일 년 치 빨래를 할까 봐 허겁지겁 달려왔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세탁기를 바라보며 건조기 속에서 따뜻하게 익어가는 저들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을 정리하게 됐다. 아, 이제야 모든 마음을 삼킬 수 있게 됐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생각이 많고 조급해질 때는 지금 해야 할 일을 먼저 하라고. 그럼 자연스레 하나둘 정리가 된다고.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이런 데 적용되는 걸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지름길이 아닐 수 없다. 단지 지금 해야 하는 빨래를 처리했을 뿐인데 씻겨 내려가는 것이 먼지와 때가 아니라 묵혀 둔 고민과 어지러운 감정 뭐 그런 것 같았다.
매년 12월 31일 나의 하루는 똑같이 돌아간다. 온 집안을 들쑤시며 청소하고 이불을 걷어 세탁기를 돌린다. 새 이불을 정리하고 청소기를 돌린다. 모든 청소가 끝나면 목욕 바구니를 챙긴 뒤 엄마와 나란히 손을 잡고 목욕탕으로 향한다. 어깨가 빠질 듯이 때를 밀고 한 손엔 바나나우유를, 한 손엔 퉁퉁 불어버린 엄마의 손을 잡고 룰루랄라 집으로 향한다. 좀 이따 맞이할 송구영신 예배를 위해 바삐 집으로 향한다. 네 식구가 나란히 교회 장의자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새해 카운트다운을 하고 익숙한 얼굴들과 인사하고. 1월 1일이 조금 지난 새벽, 지인들에게 “새해 하나님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진부하지만 진심이 가득 담긴 연락을 돌리고 잠을 청한다. 거창할 것 같던 새해는 그렇게 단조롭게 지나간다.
올해는 계획이 한 아름 촘촘하게 쌓여 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나의 걸음을 이끌어가실 그분을 신뢰하며 선명하게 주어진 계획을 품고 희망차게 달려가 본다. 분주함이 어리석음으로 번지지 않도록 한 번씩 나를 달래며. 주변이 어지럽혀질 때마다 정리해야 하는 것은 상황이 아닌 나의 마음인 것을 늘 기억하며. 진부하지만 진심이 가득 담긴 연말을 차곡차곡 정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