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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란 Jan 04. 2024

시간여행

   

  아버지 돌아가시고 첫 생신이다. 지난 어버이날도 가지 못하여 내려가며 아버지 산소를 들렀다. 2남 4녀 우리 육 남매가 모이면 늘 늦도록 어울려 놀게 된다. 이번에도 그렇게 되리라 기대했지만, 생신상 준비하느라 엄마 좋아하는 48장 그림 카드놀이도 하지 않았고, 술상도 펴지 않았다. 처음으로 아버지 안 계신 집에서 아버지 생신 맞이하니 그리움이 앞서는지 모른다. 함께 사실 때 엄마는 아버지께 그리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누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아무리 아버지와 사이가 그렇고 그랬어도 아버지 계실 때가 제일 좋았죠? 엄마는 언제가 가장 행복했어요?” 하며 물어보았다. 

  “너희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로 여기저기 댕기면서 옛날에 살던 곳 영천, 고령, 대구, 상주, 우리가 살았던 곳을 한 번 다 가 보았다. 그때가 참 좋았지.”

라고 하신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늘 고향을 그리워한다고 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듯하다. 엄마는 아버지와 좋은 시간여행을 보내었나 보다. 나도 교직 생활 42년 만인 작년에 정년퇴직했다. 코로나로 여행도 맘껏 못하게 되면서 퇴직 후 가장 먼저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는 나의  첫 발령지 학교이다. 그곳이 가보고 싶었다.   

  많은 사람은 고향을 떠나 앞만 보며 살다가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때가 많다. 첫 발령지 방산초등학교, 없어진 지 꽤 오래된 듯하다. 가끔 궁금해서 학교를 검색해 보면 어느 때부터인지 검색되지 않았다. 결혼과 함께 떠나온 나의 첫 발령학교는 교직 생활의 고향처럼 나의 내면 저 깊은 곳에 머무는 듯하다. 경북지역에서 경남지역으로 옮겨가고 또 경기도로 옮겨 간 나의 학교생활, 마치 고향을 떠나 객지로 떠도는 사람 같은 느낌을 받고 있다. 그렇게 떠나온 후, 다음 해, 딱 한 번 찾아간 적이 있다. 선생님들을 모두 만나지는 못했지만, 몇몇 분과 즐거운 만남을 가졌고, 그 후 연락이 끊어졌다. 결혼과 함께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적응하며 살아가는 나는 뒤돌아볼 여유를 갖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 후는 가보지 못했다. 나의 교직 생활을 생각하면 늘 첫 발령 학교를 떠올리게 된다. 

  아버지 안 계신 첫 생신을 보낸 다음 날, 나는 첫 발령지 학교를 찾으러 떠나는 여행을 하기로 했다. 남편이 동행해 주었다. 남편이 보는 내 모습은 마치 이산가족으로 지내다 고향을 찾는 모습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고속도로를 타다 김천 톨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지도 검색을 해 보아도 역시, 방산초등학교는 없었다. 김천은 많이 변해 있었다. 가까운 다른 초등학교를 검색해서 그 주변을 살펴보았다. 도로도 많이 달라졌고 지도도 많이 변했지만, 그 주변 위치를 확대해서 찾아보니 학교 주변은 확인할 수가 있었다. 학교 건물도 그대로 있다. 학교 앞 문구점이었던 작은 집도 그대로 지도상에 보였다. 학교 건물의 이름은 00 기술연구소로 바뀌어 있다. 남편이 목적지를 설정하고 그 길을 따라 운전해 주었다.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곳으로 향하는 내 마음이 이렇게 뛸 줄은 몰랐다.

  길가의 녹색 나무들은 내가 떠났던 그때부터 그대로 그 자리에서 ‘언젠가 나를 만나러 오리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내가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던 그 길도 많이 바뀌어 있다. 그때는 김천 시내에서 산등성이를 굽이굽이 돌아 넘어갔던 도로가 학교 앞까지 연결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시내에서 학교로 가는 길은 새롭게 넓은 자동차 전용도로로 바뀌어 있고 학교가 있던 곳으로 가려면 전용도로에서 빠져나가 짧은 옛길로 얼마간 가야 했다. 

  드디어 학교가 있던 장소에 다다랐다. 남편이 차를 학교 앞에 주차해 주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교문 앞에 섰다. 교문의 ‘방산초등학교’는 ‘00 기술연구소’로 바뀌어 있다. 학교 건물은 그대로인데 운동장은 깊게 팬 곳도 있고 산더미 같은 모래 산으로 쌓여 있다. 공사 차량이 작업을 하는 소리만 들린다. 교문 앞부터 학교 건물까지 줄지어 서 있는 소나무는 둥치가 많이 굵어져 있어 그동안의 세월을 보여주고 있다. 갑자기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리고 흐느낌 소리까지 막 나왔다. 이유를 모르겠다. 이산가족이 그리워하던 고향을 찾아왔을 때 갑자기 나오는 흐느낌이 이런 것일까? 남편도 말없이 기다려주고 있다. 나의 이 알 수 없는 기분을 이해하는 것일까? 둥치가 굵은 소나무는 자기 둥치가 가녀렸던 그 시절을 알고 있는 듯, 내 마음을 알고 있는 듯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 교문을 들어서 본관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갔다. 너무 굵게 자라 낯설게 느껴지는 굵은 소나무 사이로 장학 기념 비석 둘이 서로 의지하고 지낸 듯 나란히 서 있다. 자세히 보니, 하나는 내가 근무할 때이던 1980년에 세워졌다. 장학 기념 비석 건립했던 그날이 어렴풋이 떠오르기도 한다. 나란히 서 있는 그 둘을 없애지 않고 그대로 둔 연구소 담당자가 고맙게 느껴지기도 한다. 소나무와 장학 기념 비석이 있는 정원은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이다. 아이들의 조잘거림 소리, 선생님과 아이들이 관찰하고 사랑을 주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지는 않을까? 본관 건물을 마주하니 아이들이 있을 때 사용되었을 것 같은 노란색 큰 시계가 고장 난 채로 그대로 매달려 있다. 학교 건물은 내가 근무할 때 모습 그대로다. 오랫동안 도색이 되지 않은 낡은 건물이다. 창문에 붙어 있는 오래된 아이들의 작품들도 그대로 붙어 있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아이들이 있던 시간으로 가보고 싶은 사람들은 여기로 오시오.’ 하는 것 같다. 그 또한 감사한 일이다.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선생님, 00 이가 뱀 잡았어요.”

  아이들이 뱀을 잡았던 적도 있었다. 

 “선생님, **이와 ㅁㅁ이가 싸워요.” 

  싸우는 아이들도 많았다. 그 아이들도 그립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소리 높여), 여덟!!”     

  운동회 연습 때 매스게임을 지도하던 내 목소리도 들린다. 갑자기 더 조용해지는 기분이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멀리 운동장 공사장 공사 차량에서만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그곳에만 사람이 있나 보다. 본관 건물을 지나 사택이 있던 곳으로 가 보고 싶어졌다. 남편은 멀리서 기다려 주고 있고, 본관 건물로 들어가기에는 약간의 무서움이 앞섰다. 내가 근무하던 때, 본관 건물과 사택 사이의 넓은 땅은 텃밭으로 관찰, 실습지로 가꾸어져 있었고, 사택은 교장 선생님이 사용하던 공간으로 사모님이 가끔 나와서 아이들을 보기도 했던 곳이다. 지금은 텃밭은 사라졌고 아이들의 작은 놀이터가 보이고 낡은 그네가 매달려 있다. 사택은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삭막해 보인다. 내가 근무하던 그 시절, 7 학급의 작은 학교이었지만 학교가 없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마치 내 고향이 사라진 것 같다. 이젠 내가 낯선 사람이라는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너무 먼 시간여행을 떠나온 것처럼.      

  아이들이 없는 학교는 너무 삭막하다. 그 주변과 마을까지 모두 삭막해 보인다. 또 다른 곳에도 아이들이 없는 학교들이 있다. 학교 건물은 큰데 아이들이 없어 빈 교실로 둔 학교도 있다. 나는 또 다른 지역에서 근무하며 입학하는 아이들이 적어 인근 학교 주변의 아이들을 찾아 우리 학교에 입학해 달라고 학교 운영에 대해 홍보하며 다닌 적이 있다. 학교 홍보를 해서 한 명이 우리 학교로 입학하면 다른 학교 학생은 한 명 줄게 된다. 폐교 직전에 있던 학교가 학교 홍보와 좋은 학교 운영으로 학생 수가 늘었다고 뉴스에도 가끔 나온다. 그건 결국 조삼모사와 같다. 모든 학교가 좋은 학교 운영을 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은 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이 점점 줄고 있다고 걱정만 한다. 나도 그렇다. 젊은이에게 ‘결혼하는 게 좋다. 결혼하면 자녀 많이 낳는 게 좋다’는 이야기하려면 조심스러워진다. 잘못 말하면 크게 오해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다. 점점 비어있는 교실, 아이들이 없는 학교가 늘어날까 봐, 텅 빈 마을이 늘어날까 봐 두렵기조차 하다. 우리나라는 개개인의 많은 생각들을 존중한다. 비어있는 교실 때문에, 아이들이 없는 학교 때문에 결혼을? 아이를? 당치 않은 논리다. 

  내 고향을 다시 찾았을 때 내 고향이 평화롭게 나를 맞아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학교도 누군가 거쳐 간 학교를 다시 찾았을 때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 들으며 아이들과 함께하는 좋은 시간 여행이 되는 곳이면 좋겠다. 그래도 아기 울음소리가 여기저기 많이 들리면 곧 그리 되지 않을까?                      

글을 쓰기 시작만 하고 쓸 수가 없었음,   

 미완성 한 날   2022. 12. 24.

   수정 한 날     2023. 1. 4.

재수정     2023.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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