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를 힐링 속에서 시청한 나로서는, 해방일지라는 제목이 주는 반가움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소설이었다. 초록색과 빨간색이 주는 원색의 조화에 아기자기하게 한 손에 들어오는 책의 예쁜 외형도 소설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책이 예쁘면 왠지 읽고 싶어진달까, 표지 디자인 역시 중요하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p.7
아버지의 죽음을 이렇게 표한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죽음 그 자체로도 충격일 텐데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심지어 평생을 정색하다 죽는 순간까지 진지 일색으로 죽었다고 표현한 이 소설의 화자는 아버지와 과연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화자 고아리의 아버지 고상욱은 고작 4년의 세월을 빨치산으로 살았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평생을 남한에서 빨치산으로 낙인찍혀 살아야만 했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빨갱이는 남한에서는 죄악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4년의 세월보다 인생의 훨씬 많은 시간을 누군가의 이웃으로, 친구로, 가족으로 살아왔음에도 사회는 그를 이념의 족쇄로 옥죄었고, 딸인 아리마저도 그런 아버지의 삶을 이념의 틀안에 가둬두기에 이른다. 그도 그럴 것이, 빨치산 고상욱의 삶은 연좌제란 이름으로 그의 가족들에게까지 이념의 그늘을 드리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아버지가 죽었다. 아버지가 죽고 아버지와 생전 연이 닿았던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오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딸의 인생을 망쳤던, 이념으로만 똘똘 뭉쳐있었던 딸의 시선 속 아버지는 그 3일의 장례 동안 이념 너머의 또 다른 모습으로 서서히 드러난다.
"오죽하면 나헌티 전화를 했겄어, 이 밤중에!" 또 그놈의 오죽하면 타령이었다. 사람이 오죽하면 그러겠느냐 는 아버지의 십팔번이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p102
생전 아버지의 18번은 "오죽하면" 이었다. 아버지는 빨치산으로 옥고를 치르고도 남의 보증을 서거나 이웃의 농사일을 돕는다. 정작 본인의 삶이 시궁창일지언정 생판 모르는 사람도 "오죽하면"의 논리로 거둔다. 공산주의자, 빨치산이 아닌 인간 고상욱의 삶은 오죽하면 그랬을까로 표현되는 사람들의 이웃이었고, 친구였고, 동료였다.
이념의 반대편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와 친구가 된 사람들, 맞담배를 피우고 우정을 나누었던 17살 노랑머리 소녀, 자랑스러웠던 형이었지만 그로 인해 눈앞에서 아버지를 잃은 작은아버지, 연좌제로 꿈을 이루지 못했던 큰집 길수 오빠, 자꾸 다시 온다는 장례식장의 아버지의 인연들..
3일간의 장례 동안 딸 아리는 아버지의 살아생전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아버지의 모습을 그 인연들을 통해 경험하고 느낀다. 그 다양한 인연들과 아버지 사이에는 감사와 그리움이 있기도 했고 때로는 분노와 원망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딸 아리는 그 인연들이 마주했던 아버지와의 이야기 속에서 빨갱이도 극단적인 이념주의 자도 아닌 진짜 아버지의 모습을 비로소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싸워야 할 곳은 산이 아니라고, 사람들이 불빛 아래 옹기종기 모여 밥 먹고 공부하고 사랑하고 싸우기도 하는 저세상이라고. 아버지라면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제는 싸늘하게 식은 아버지의 유골을 가슴에 품은 채 나는 자수하던 날의 아버지처럼 세상을 향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p256
아버지의 유골을 백운산이 아닌 생전 자주 다니시던 곳 여기저기 뿌릴 결심을 한 딸 아리.
딸 아리는 아버지의 어떤 기억이 남아 있을지 모를 길 어딘가에 유골을 흩뿌리며, 빨치산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인간 고상욱으로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한다.
"할배가 그랬는디, 언니가 여개서 썽을 냈담서? 할배가 아줌마 궁뎅이 두들겠다고? 그때께 할배 맴이 요상허드래, 아부지라는 거이 이런건갑다, 산에 있을 적보담 더 무섭드래. 겡찰보담 군인보담 미군보담 더 무섭드래."아버지 유골을 손에 쥔 채 나는 울었다.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해방일지, p265
소설은 아버지와 맞담배를 피우던 17살 노란 머리 소녀의 이야기에 울컥 눈물을 쏟는 아리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아버지는 빨치산도 빨갱이도 아닌, 그저 딸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던 나의 아버지였음을 깨달으면서 말이다.
아버지가 죽고 난 후 아버지와 화해하게 된 것같은 마지막 장면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펑펑 눈물이 나왔다. 이념의 대립이나 갈등때문은 아니지만, 나도 내 아버지와 그리 살갑지만은 않은 사이로 지내와서 일까. 욱하는 경상도 아버지라 화를 낼때면 온몸이 떨릴 정도로 무섭기도 했고, 그러다가 또 다정할 때는 한없이 다정한 사람이 바로 우리 아버지다. 이러한 극한의 간극때문에 아버지를 대하는 나의 태도에는 몇겹의 어색함이 켜켜이 쌓여있다. 이제 나이 70이 넘어 예전의 그 엄격했던 눈매도 몇겹의 주름으로 가리워진지 오래지만 가끔 기세등등했던 아버지의 옛 모습이 떠오를때면 아직도 내심장은 빠르게 쿵쾅거리곤 한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으며 나의 아버지를 생각해본다. 엄격하고 무뚝뚝한 아버지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 인생의 기쁨에는 한없이 다정했고, 나의 아픔에는 조용한 위로를 보내주었던 아버지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 누구보다 나의 행복을 바라는 분임을 나는 잘 안다. 아버지는 은퇴 후 전국 방방곳곳으로 산행을 다니시는 중이다. 그렇게 당신이 원하는 삶을 사시면서, 그동안 무겁게 짊어졌던 가장으로서의 무게를 내려놓고 온몸으로 해방감을 느끼며 살아가셨으면 한다.
추천의 말: 소설을 읽는 내내 흡입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작가 정지아의 필력에도 감동했다. 무거울 수도 있는 이야기를 작가 특유의 문체로 유머러스하게도, 또 울컥하게도 만든다. 더불어 소설은, 이념의 대립으로 생채기를 겪었던,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이념적 갈등에 대해서도 생각할 여지를 남겨준다.
한번 잡게 되면 단숨에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책이다. 왜 20쇄본을 넘겨 발행하며 베스트셀러가 됐는지 무조건 고개가 끄덕여지는 책. 웃음도 눈물도 감동도 있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강력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