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양귀자 작가의 <모순>을 읽고 있다.1950년대 생인 그녀는 2025년 현재, 오프라인 서점들의 베스트셀러칸에 두 권이나 장편소설을 올려둔 사람이다. 너무나도 단조롭고 옛것 같은 표지와 양귀자 작가의 이름을 두어번 읖조려보며
'너무 촌스러운 느낌인데'
라고 무심결에 생각하고 지나가버린 작품 중 하나가 <모순>이었다. 하지만 하염없이 시간이 지나도, 유행따라 바뀔 것 같은 베스트셀러 칸이 진짜 베스트셀러 칸이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마치 그곳을 무덤으로 정했다는 것 마냥 <모순>을 포함한 그녀의 두 권의 책은 베스트셀러 칸에서 방 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기에. 어느 순간 '이건 그냥 유행이 아니라, 시대를 나타내는 작품인 걸까?'라는 관심이 생겼더랬다.
그리고 지금. 그 두 작품을 거의 다 읽어가는 지금. 26년 전에 나왔지만, 스마트폰은 커녕 삐삐 세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기술과는 다르게 전혀 발전하지 못하기에 아름다운 2030의 감성과 낭만을 담아내는 양귀자 작가는 내게 있어 가장 세련되게 감정을 구사하는 소설가로 자리잡았다. 예전에는 촌스럽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이름이 지금은 마치 단조로움을 깨려고 하는 모더니즘 추구자의 노림수 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하여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본론은. 작품 <모순>에 나오는 한 구절을 되뇌이며 나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앴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준 주리였다.
아직 결말을 읽지 않았기에 흥미롭게 읽고 있는 작품 <모순>에는 주인공 '안진진'을 중심으로 한 가족과 연애에 대한 다양한 사건들이 흘러간다. 그녀는 최대한 그 사건들을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싶어한다. 그게 쿨하니까. 담대해보이니까. 20대인 주인공이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밑천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인생이라는 건 대부분 내가 주인공이 아니지만, 내가 원치 않을 때는 피할 수 없는 인생에 무대로 나를 초대한다. 거부권이 없는 초대장이다. 이 논리는 주인공 '안진진'에게도 적용된다. 술꾼에 어머니 비상금을 털어가던 하남자 아버지와, 살인미수로 감방에 갔으면서도 여전히 현실 감각 없어보이는 남동생, 속옷과 양말을 팔아 구질구질하게 삶을 살아내가는 어머니, 그리고 그런 삶을 가장 비참하게 하는 '어머니와 얼굴이 똑같이 생겼으면서 180도 다른 삶을 살아가는 쌍둥이 이모'의 존재까지. 진진의 삶은 그녀가 피하고 싶은 '인생의 부피를 늘리는' 일들로 가득하다.
나는 여러번 진진이 그녀의 인생을 자조적으로 느끼면서도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슬프게도 나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은행원으로 20년 넘게 일했으면서도 돈이 무서운 줄 몰라서 퇴직 전에 퇴직금까지 당겨서 투자를 했는데 하필 또 실패했다. 돌다리 두들겨 보고 건너는 것 보다 불나방처럼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불길로 뛰어드는 걸 좋아했던 아버지가 기억해야했던 것은 '그가 돌봐야 할 처자식이 있었다는 점'이다.
한번도 이런 일로 아버지를 원망해본 적은 없었다. 그가 그렇게 무리하게 투자하면서까지 당시 외국에 나가있던 내게 생활비를 하라며 보내준 돈으로 호위호식 했던 것은 나였다. 당시 돈 많은 친구들과 나를 비교하며 이곳에서 계속 유학생활을 하고, 나도 돈세탁으로 만들어낸 외국 대학의 졸업장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돈세탁이라고 표현한 것은 실제로 그 유학생활이 돈이 있어야 가능한 학업이기에 그렇다. 세탁도 노력을 해야 성공할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세탁비가 없었고, 나는 세탁비조차 만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장학금을 노릴 정도로 치밀하지 않고, '진진'의 표현을 따르자면 나는 당시 인생의 부피가 굉장히 적었던 '주리'에 비슷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내가 구지 힘들게 돈을 벌어서 학업을 해야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거 같다.
그때로부터 13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사이 누구보다 열심히 살면서 스스로 세탁비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됐다. 물론 그 돈은 세탁비로 쓰이지 않았다. 그냥 정말 '생활비'로 썼다. 생활비 이상의 사치품을 사며 '시발비용이다, 스트레스 관리비다'라고 쉽게 이야기하고 지나간 적도 있다. 과거 엄마가 복채를 주고 내 사주를 봐줬다는 무당은 '내가 돈으로 고생할 일은 없다'라고 했다는데. 그러기에 나는 요즘도 매달 카드값 나갈 날만 걱정하고 산다. 물론 투자 명목으로 돈을 굴리고 있는 것도 있고, 당장 굶어 죽을 정도로 힘든 것은 아니지만, '돈걱정 안할 사주'치고는 꽤나 '돈걱정'만 하고 있는 듯하다. 아무래도 그 무당 분은 내 사주를 과대평가했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당시 엄마가 쥐어줬던 복채가 꽤나 많았을 수도 있고.
내가 직접 보러가지도 않았던 그 무당의 말을 20년 넘게 되뇌고 있는 것은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내게 많은 것을 해주신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진진의 삶을 들여다보며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술꾼이고 어머니의 비상금을 몰래 털어가는 하남자지만, 그런 아버지가 낭만을 가르쳐줬다며 아버지를 두둔하는 진진. 그러면서도 구김살 없이 살아온, 돈 걱정 안하며 사는 이모를 두번째 엄마라고 생각하며, 실제로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엄마라고 이모를 소개하기까지 하는 우리의 안진진의 삶을 보며 참 애처롭고 딱하다는 마음 밖에 들지 않았다.
마음 깊숙히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남들에게 이야기해야지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진진의 모습이 아프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모습이 아프게 다가온 것은 '나'를 투영해봤기 때문일 것이었다. 물론 미래를 위해 투자했을 아버지지만 퇴직금조차 1원 한 푼 건지지 못하고, 20년 넘게 충성했던 회사에서 불명예스럽게 내쫓긴 아버지. 그런 그의 밑에서 갑작스럽게 가장의 몫을 나눠들어야 했던 어머니와 나 그리고 남동생. (물론 진진은 나처럼 아버지의 덕을 본 날들이 없는 것 처럼 서술되어 있긴 하지만) 아마 나 말고도 많은 사람이 진진의 삶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약해져가는 아버지, 궁상맞은 엄마, 감방에 있는 남동생이 아닌 다른 모습의 불행이 자리하고 있을 것임으로.
그리하여 원치 않게 인생의 부피가 커진 진진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원치 않게 인생의 부피가 커진 나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13년전 스스로 세운 옹성을 무너뜨리면서 가족에게 부담을 나눠지게 했던 아버지를 오랫동안 마음 속으로 원망하고 있는 나를.
하지만 말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진진은 마치 남들에게 다 일어나지 않는 일이 왜 나에게 일어나는지 궁금해한다. 아버지는, 어머니는. 왜 내가 원하는 대로 그들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지 원망한다. 그러나 그녀가 무서워하는 자연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그들도 진진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딱히 '역할'을 지킨다기 보다는 그저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 숨 쉬기에 사는데 무슨 잘잘못을 이리도 따지는지. 그들 입장에서는 비교쟁이 자식들이 자꾸 견문을 넓힌답시고 자신이 갖고 있는 부모와 남을 비교하며 스스로 불행을 불러들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욕심을 욕심이라 하지 않고, 경험이라 부르면서. 행복을 행복이라 하지 않고, 불행이라 부르면서.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앴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준 주리였다.
나는 남은 <모순>의 페이지를 넘기며 바랄 것이다. 진진의 인생의 부피가 더 넓어지지 않기를. 그녀의 불행이 더 커지지 않기를. 하지만 진진이 실제 존재한다면 이야기해주고 싶다. 살아가며 인생의 부피는 어쩔 수 없이 넓어진다. 그건 그냥 나이를 먹으면서 아는 게 많아지기 때문일뿐. 구김살 없이 살고 싶고, 엄마가 아닌 이모의 자식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이 스스로를 좀 먹게 하고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아버지가 술꾼이고, 실패를 거듭했던 것은. 그냥 여름 다음에 가을이 오고, 첫눈이 내린 후 3개월 쯤 지나면 다시 봄이 오는 그런 자연의 섭리 같은 거라는 걸. 좋은 굴을 찾아 더 따뜻하게 겨울을 나는 동식물들이 있겠지만, 황무지에서 추위와 맞서 살아야하는 생물들도 있다는 걸. 일일히 비교하며 살기에 이 삶, 우리의 인생에는 인생의 부피를 넓혀줄 '행복'이 많다는 사실도.
꼭 전해주고 싶다. 진진에게. 그리고 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