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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브릿지 교수가 된 캥거루

유안수 작가

by 안착한여성들 Mar 17. 2025


오해 마시길.

어느 해리 포터를 괴롭히고 다니는 건 아니다!






지난주, 대학원 석사과정 첫 학기가 시작되었다.


개강 전에 기숙사 신청 기간이 있었다. 본가는 학교에서 도보로 20분 정도다. 한마디로 가깝다. 그래서 고민이 여러모로 많았다.



먼저 전체 대학원생 중에 겨우 몇십 명 뽑는다. 확률적으로 당첨되기 힘들다. 만약 뽑힌다고 해도 나같이 본가가 가까운 사람이 더 절실한 사람의 자리를 차지하는 게 양심에 찔린다.


무엇보다도 물가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식비. 소소한 알바 급여로는 고물가 시대의 자취 식비를 감당하기가 어려울 게 뻔했다. 더구나 기숙사는 조리도 어렵다.



그렇다면 하루에 한 끼라도 집에서 먹고, 잠과 생활은 기숙사에서 하면 안 될까? 이 생각도 안 한 건 아니다. 그런데 너무 파렴치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집에서 좋은 것만 취하고 집안일 등의 책임은 회피하는 게 아닌가. 남의 돈으로 자유까지 사려는 태도는 나쁘다.



결국 무엇보다, "학교가 집 앞인데 웬 돈 낭비냐"는 부모님의 일침이 마무리 홈런이었다. 기숙사는 지원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캥거루 타임은 연장되고 말았다.






대학원생들은 보통 자기 학과 연구실 자리 하나를 배정받는다. 이과 쪽 대학원생들은 주로 지도교수와 함께 '랩실'이라고 보통 부르는 연구실에서 하루 종일 근무하는 식이지만, 문과 쪽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문학도셨던 어머니도 연구실 자리가 있긴 했지만 너무 열악해서 거의 도서관에서 연구를 했다. 우스갯소리로 '문사철'은 종이와 펜만 있으면 된다는 말도 있으니... 문학은 아니지만 어쨌든 내 학과도 문과이니 집이나 도서관에서 공부해야겠다 마음먹어둔 참이었다.



개강 날, 과사무실의 조교님이 내 자리가 있다는 연구실로 안내해 주었다. 별 기대는 없었는데 문을 열자... 깔끔한 푸른 톤의 파티션 공간이 산뜻한 히터 바람에 무척 따스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연구실은 작은 회사 사무실 같았다. 옆 자리와는 튼튼한 칸막이가 있었다. 자리마다 컴퓨터도 있었다. '다들 컴퓨터를 자기 돈으로 샀나 보다. 나도 사야 하나...' 생각하던 순간, 과사 직원이 연구실 구석에서 모니터, 본체, 마우스, 키보드, 전선 등을 하나씩 내 자리에 올려두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앞으로 쓸 컴퓨터란다. 세상에!



어릴 때 가족 공용으로 쓰던 윈도우 XP가 깔린 데스크탑 이후로 처음으로 '내 것처럼 쓸 수 있는' 데스크탑이었다. 게다가 이건 오직 나만을 위한 최초의 데스크탑. 예상치 못해서 더더욱 기뻤다.


컴퓨터는 내가 직접 설치해야 했다. 평소에 충전기 선에도 흥미가 없어 꺼진 휴대폰을 방치하던 나였지만, 그날은 흥분해서 몹시 열정적으로 본체 위치를 정하고 필요한 전선들을 서랍에서 뒤져보고 키보드와 마우스를 본체에 연결했다. 마침내 HDMI 선을 찾아 모니터와 본체를 연결한 뒤 본체 전원을 꾹 누르고, 버튼이 파랗게 빛나면서 화면에 웅장한 자연환경이 담긴 잠금 화면이 드러난 순간, 처음 느껴보는 감격이 차올랐다.







더욱이, 내가 집 밖에서 제대로 된 '자리'를 얻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대학생일 때에도 학과 공간에 거진 살다시피 했지만 '내' 자리는 없었다. 항상 모두의 공간이었기에 가장 좋아하는 자리도 다른 이가 쓸 수 있는 자리였다. 함부로 꾸밀 수도, 내 물건을 놔둬서도 안 되는 곳. 언제라도 비켜줄 자리.


그래서 그때는 노트북이었다. 노트북은 이곳저곳 옮겨 다닐 수 있고 이게 노트북이 필요한 이유이다. 데스크탑은 고정된 데스크가 있어야 한다. 그게 스타벅스에서 데스크탑을 쓰는 게 몹시 이상해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한창 카페 사장들이 전자기기 과다 사용으로 골머리를 앓는다는 이슈가 있었을 때, 이런 사진들도 유명했다. 이 사진이 실린 기사의 제목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 눈 의심했다" 전선들이 마치 혈관처럼 보이기도 한다. 내 것이 아닌 곳의 전기를 과도하게 흡혈하는 건 상도덕에 어긋난다.


그리하여 우리 안의 마지노선, 카페에 들고  최대한의 전력장치인 노트북과 함께 성인이 되고 6년간을 그렇게 떠돌았는데, 내 자리와 데스크탑이 동시에 생겨버린 것이다.



책상이 충분히 넓다 보니 자연스럽게 꾸미고 싶다는 욕망이 차올랐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집에서 어떤 물건을 가져올지 고민하는 게 즐거운 일상이 되었다. 선물 받아놓고서 안 쓰던 휴대용 전등, 남아돌던 달력을 배치해 두었다. 당근도 했다. 전공책, 논문이 많아지다 보니 학교 근처에서 단단한 북앤드 4개를 5천 원에 얻어왔다.



물가가 비싸고, 연구실 안에 공용 냉장고가 있다 보니 도시락을 싸 오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첫 며칠은 도시락과 함께 수저와 젓가락도 키친타월에 둘둘 말아 싸왔는데 너무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샀다. 수저케이스! 딱 5천 원밖에 안 하는데 소리도 안 나고 좋다.



이런 식으로 물건을 집에서 가져오고 사고 주워오던 날들이 지나고, 문득 의문이 하나 생겼다.




...왜 이렇게 분홍색 물건이 많지?




충격이었다. 나.. 분홍색을 좋아했다. 독서대 받침으로 쓰는 상자는 연한 분홍색, 포스트잇도 비슷한 색깔이고, 수저케이스는 약간 주황빛이 도는 세련된 분홍이다. 심지어 한 번도 신경 쓴 적이 없었는데, 내 아이패드 케이스는 몇 년 간 분홍색이었다. 심지어 애착 목도리도 분홍...



새삼스러운 색깔 취향을 깨닫자 갑자기 확 무서워졌다. 혹시 연구실 사람들이 해리포터 5편에 나오는 엄브릿지 교수 같은 존재로 나를 생각하는 건 아닐지 말이다. 물론 나처럼 해리 포터를 많이 읽은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워낙 분홍의 대명사셔서...





그런데 이 교수, 인성이 문제지 패션이나 인테리어 감각은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돌아보면 어릴 때 위 사진의 망토를 탐냈던 것 같기도 하다. 벽에 달린 고양이 액자들의 무늬 하나하나도 예사롭지 않은 걸... 하여간 처신을 잘할 이유가 생겼다. 조금이라도 악독해진다면 반드시 '엄브릿지'로 별명 붙여지고 말 테니.



자리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취향을 발현할 수 있다니 새로운 발견이다. 나중에 내 방, 내 집이 생긴다면 어떨까. 이래서 사람들이 많은 돈을 들이고도, 위험을 감수하고도 자신만의 방과 집을 찾아 본가를 떠나는 걸까.


왠지 내 삶에 책임감도 더 생기는 느낌이다. 이 연구실 자리를 잘 보전해야겠다고, 사람들과 잘 지내야겠다고 다짐한다. 기실은 책임감보다 즐거움이 배로 크다.



그리하여 요즘 내 양 볼따구는 발그레하다. 빨강에 가까운 분홍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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