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수 작가
서글서글 인상 좋던 선생님이 강의실에 없었다.
나보다 더 오래 일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만둔다는 말도 없었다.
곧이어 원래 그가 있을 자리에 더 늦은 타임 선생님이 들어갔다. 아이들은 이상함을 느끼지 않을까? 슬쩍 강의실을 들여다보니 평소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역시 잠깐 안 나오시는 건가 보다. 그러니까 이런 분위기겠지.
반 시간쯤 지났을까. 필요한 학습지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직원에게 물어보려고 복도를 걸어가다가 우연히 학원 상담실에 앉아있는 그를 봤다. 강의할 시간에 왜 여기 계실까? 문득 선생님이라면 학습지가 어딨는지 알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그는 바로 나를 돌아보았다. 언제나처럼 그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학습지의 행방을 묻자 자기가 알고 있다며, 다른 강의실까지 들러서 찾아 건네주었다. 유독 슬퍼 보이는 얼굴. 혹시 그만두시는 건가요, 묻지도 못하고 일이 많아 빨리 자리로 돌아왔다.
공백의 전말을 알게 된 건 다음 날이었다.
“컴플레인이 들어왔대요. 수업이 지루하다고요.”
아…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옆방에서 근무할 때 간간이 들었던 그의 강의는 퍽 괜찮았는데, 수강료를 지불하는 입장에서는 다르게 들릴 수도 있겠지. 무척 아쉽고 슬펐다.
그런데 이 감정이 비단 그를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내 차례는 언제쯤일까?'
아직 원장님은 내게 친절하다. 내가 그에게 필요한 존재임이 너무 감사한데, 이 감사한 마음 자체가 씁쓸함을 불러온다. 나는 너무도 작은 존재다. 누구에게 인정받아야 살 수 있으며, 아직 제대로 인정받아본 적도 없는 애송이다.
여전히, 아니 갈수록 더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이 행복감을 준다. 어머니들이 나이 드셨다고 집안일을 아예 하지 못하게 하면 우울증에 걸리는 경우가 있다고 본 적이 있다. 이제 이 집에, 자식들에게 자신은 필요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삶의 의지가 확 줄어버린다고 그랬다.
자식에게 필요 없는 어머니와 반대의 상황은, 자식이 어머니에게 완전히 의존할 때일 것이다. 사람들은 아기를 키우면서 몹시 충족된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나는 아기를 키우며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의 기반이 '아기가 나를 전적으로 필요로 하는 존재'여서라고 생각한다. 아기는 타인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다.
자식에 헌신하는 어머니의 감정은 '사랑'으로 여겨진다. 이 사랑도 근본적으로는 '필요'로 치환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렇데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는 건 마치 그를 수단으로 여기는 느낌이 든다. 그러면 어머니는 아기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필요로 하니, 결국 아기를 수단으로 대하는 걸까?
칸트의 도덕법칙 중 하나 "인간은 자신과 타인의 인격을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이 번역때문에 종종 오해받는다. 칸트는 인간을 수단으로 절대 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도 대하라는 것이었다.
모든 생물은 자기 이외의 생명체든 사물이든 모두 수단일 수밖에 없다. 타인을 모두 정확히 알 수 없기에 그를 정확히 위할 수도 없다. 타인을 귀하게 여겨 그의 목적을 위해 기꺼이 내 삶을 공유할 수 있을 때에도 타인이 수단인 건 여전하다. 그가 행복해져서, 나도 행복하니까. 결국 그의 행복이 궁극적으로 나에게 선(善)이 되기 때문에 그를 위해 사는 것이다. 결국은 자신의 행복을 위한다고 볼 수 있다.
이쯤에서 돌아보자. 나는 캥거루족으로서, 어느 글에서인가 집안일을 자꾸만 하게 되는 내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그다음 글에서는 내가 이러는 이유가, 아무래도 가진 게 쥐뿔도 없기 때문에 부모님의 경제력에 기대는 비교적 편한 방안으로 서울에서의 생존을 보장받기 위한다는 큰 줄기 위에 있다는 분석을 했다.
그렇다면, 나는 부모님에게 '정말로' 필요한 존재인가?
부모님의 유전자를 가졌기에 나는 영구적으로 부모님에게 필요한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단지 '유전자의 동일성'만으로 내가 필요한 존재라는 건 그리 와닿지 않는다.
유전자는 육체의 너무도 미시적인 바탕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사회적 존재로서 타인과의 관계를 중시하게끔 진화된 인간들에게 유전자적 동일성만으로, 그러니까 자식이라는 이유로만 사랑받는 건 씁쓸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종종 잊고 사는데, 외모든 능력이든 기실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릴 수 있다. 오래간 유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 인간은 그런 취약한 것이라도 가져야 서로 간에 필요로 하고 필요되며 사랑 안에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다. 다소 슬프지만 현실이 그렇다.
누군가는 어떤 매력적인 요소를 통해 애인으로부터 필요될 것이다. 뭐, 동정이라도. 연애가 싫다면 직장에서라도 필요한 존재가 되면 될 것이고, 직장이 없다면 봉사활동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타인에게 도움이 될 만한 부분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 존재일지라도, 그러한 특성을 가졌음에도 살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사랑을 갈구한다. 그리고 사랑을 주고도 싶다. 내가 누군가를 필요로 해서, 그가 사는 맛을 느낀다면 또 좋을 거다. 지금의 욕심에는 정말 많은 이들에게 필요되어지는 존재가 되고 싶다. 돈을 빌려줄 수도 있을 만큼 넉넉하고, 아름다운 물건들을 가져서 눈을 황홀케 하는 사람이 되고도 싶다. 그리고 미천한 지금과 달리 아주 지혜롭고 싶다. 많은 이들이 나의 지혜를 구하러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것의 다음 단계는 결국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걸까.
그런데 이 단계는 많이 사랑을 받아본 뒤에야 갈 수 있는 것 같다.
여행을 최소 한 번 가봐야 "여행 별 거 없네"라고 말할 수 있듯이. 누군가 "너 아직 유럽은 안 가봐서 그러는 거야, "라고 하는 걸 반박하려면 유럽에 가봐야 하는 것처럼.
과연 죽기 전에 '필요' 자체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을까? 설사 누군가 나를 음해해서 죽음에 이르게 하더라도, 모두가 나를 외면하고 나를 괴롭혀 진정 혼자가 되어도 나뿐만으로 행복해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사실상 이는 신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온전히 혼자 존재할 수 있는 존재라. AI, 태양광 등으로 전력을 자체 공급하는 로봇 같은 것을 보면서 언젠가는 인간이 혼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을까 상상해보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AI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정보가 들어가 있다. 그 무엇보다도 많은 존재들에게 의존했던 셈이다. 과연 이것이 혼자 존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결국 오롯이 서기 위해서는 모든 것에 기대야 하는가? 너무 많은 지지대가 있어서, 오히려 붕 뜬 것처럼 보이는 상태가 자존(自存)인가?
답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 단계를 논할 때는 아니다.
일단 사랑을 더 받아볼 테다. 능력이든 학식이든 외모든 돈이든 최대한 노력하겠다. 내가 필요하다는 사람이 있으면 해 줄 수 있는 선에서 도와주고, 누군가가 필요할 때는 그의 상황을 살피고 도움을 청해야지.
지금의 나는 사랑이 아주 많이 필요하고, 필요되는 존재가 되고 싶다. 어리석어 보일 지라도 이게 나의 현재이다.
작가 유안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