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시작해
브런치를 연재하기 전의 나는, 글을 쓸 환경이 완성되면 본격적으로 내 이야기를 해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환경이 완성되기를 기다려 무언가를 하는 것은 실행 가능성이 매우 낮아진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결정적으로 내가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내 머릿속의 생각들이 모두 휘발되어 버릴 것이라는 불안감이 지금 당장의 글을 쓰게 하는데 작용했다. 물론 모닝페이지를 통해서 나만 볼 수 있는 내 생각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것보다 좀 더 오피셜한 버전의 공유 기록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브런치를 시작했다. 여러가지 sns 중에서 브런치를 택한 이유는 나중에 책으로 엮을 때 좀 더 용이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모닝페이지보다 공적이고 블로그 보다 사적인 목적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준비되지 않았을 때라도 습관처럼 기록을 해 나가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오늘의 기록을 시작한다.
공리주의
최근에 아는 지인을 만나고 왔다. 그는 내가 20대 초반에 창업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교육을 받고 있을 때 같이 교육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10년 뒤의 그는 큰 건물 전체를 회사로 쓰는 대표가 되어 있었다.
몇년만의 만남이 조금 어색하고 긴장되었던 나는 만나자마자 내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쏟아냈다. 그러다보니 지난 글에서 언급한 이기심에 대한 주제도 나오게 되었다.
내가 꺼낸 주제에 대해서 그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공리주의라는 개념을 들었다.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피해가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가 들었던 가정을 이야기 해주겠다.
첫번째 가정. 2천명의 기차에 사람들이 타고 있다. 만약 당신의 자식을 죽게 한다면 이 기차에 탄 2천명을 살릴 수 있다. 당신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두번째 가정. 당신과 여러 명의 사람들, 당신의 자식이 함께 있다. 한 사람만 죽으면 전체가 살 수 있다는 조건이다. 그러나 누군가 죽지 않으면 모두가 죽게 되어있다. 당신에게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결정권이 있다면 당신은 누구를 죽게 하겠는가?
나는 답변은 이랬다. 첫번째 가정의 경우에는 나의 자식을 살리겠지만 두번째 경우에는 다 같이 죽는 것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물론 다 같이 죽는다는 결론도 쉽지 않은 결론이다. 어찌 되었든 나의 두번째 결론이 공리주의에 반대되지만은 않는 이유가 있다.
누군가에게 강요되는 죽음이 있을 경우 그 한 사람이 겪는 불행은 살아남은 여러 사람의 기쁨보다 더 클 수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희생당한 개인과 가족이 겪은 정신적 고통 또한 비용으로 계산될 수 있지 않을까? 뿐만 아니라 그러한 선택이 인간에게 불러일으키는 회의감이 전체 사회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같은 공리주의여도 어떤 구성원으로 이루어졌느냐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철저히 객관적인 지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