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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미엘리 Mar 18. 2024

남의 인생 엿보기


남편이 집 짓는 일로 먹고살다 보니 지난 27년 동안 수많은 집들이 우리 손을 지나갔다. 집주인들이 그 집을 떠나는 이유는 다양했다. 투자, 직장, 결혼, 이혼, 죽음(내가 살던 집에서 죽는 것도 복이다.) 이중 부모가 나이가 들어 사망한 후 자식들이 처분하는 집들을 종종 마주한다. 자식들이 같이 살지 않는지라 돈이 되는 물건들이 없는 이상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처분하려는 집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어차피 집을 부수고 다시 지을 예정이니 집안의 물건을 안 치워도 된다는 조건을 걸면 그들도 청소비용이 절약되는 터라 좋아라 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일반인들이 기겁한 집들을 싸게 구입하는 기회도 많았다. 매매 사인이 끝나고 열쇠가 손에 들어오면 우리는 그 집에 들어가 남은 물건들을 차근차근 흩어본다. 주인들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그들이 고스란히 남기고 간 집과 물건들은 색과 빛이 바래고 냄새가 났다. 죽음의 냄새였을까? 이런 집들을 둘러보게 되면 그들이 이 집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게 된다. 부지런했는지, 게을렀는지, 취향이 뭔지 등등 본의 아니게 그들의 삶을 엿보게 된다. 부모님 물건을 하나 건들지 않고 집을 처분한 자식들을 한심하다고 욕을 했지만 나 자신도 내 물건을 처리 못 하는데 하물며 부모 짐까지 정리한다는 건 무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남의 일이 아니다. 내 집에도 생면부지(生面不知)인 누군가가 내 삶을 엿보는 상황이 없으라는 보장이 없다. 오늘부터 나의 새로운 숙제는 조금씩 버리기다. 혹 떠나는 날을 미리 알게 되면 내가 먼저 다 버리고 가고 싶은 바람이다.
부지런히 주변을 정리해야겠다.


그림 김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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