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BGM] 이랑 - 너의 리듬
연애가 끝나면 평소에는 없던 청소병과 정리병이 발병한다. 추억이 담긴 물건을 깨끗하게 치우고, 플레이리스트는 전체삭제, 사진첩은 선택삭제(클라우드 동시 정리 필수)한다. 그런 내가 절대 버리지 못한 연애 편지가 있는데 사연은 이렇다.
우리의 연애는 내가 우연히 그 사람의 글을 읽고 반한 것에서 시작했다. 약간의 호감이 있던 상태에서, 솔직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그의 글을 읽고 그사람과 만나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었다. 꽤나 한참 전의 일이라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도 나는 그래서 난데 없이 그사람 고향에 여행을 간다는 핑계로 정보를 좀 달라며 연락을 했던 것 같고 이후로 어찌어찌 우리는 만나게 됐던 것 같다.
사귀고 얼마 후 그는 내 메일로 뜬금없이 편지 한통을 보냈다. 함께 기자단을 할 때 마감일에 기사를 보냈던 형식을 따다 순번을 나눠 몇가지 나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국어국문학과 학생답게 맞춤법은 틀린 것 없이 정확해보였고, 내용은 정말이지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나는 약간 주의력 결핍이 있어 긴 글을 한번에 읽기 힘들어 하는 편인데, A4 두 장 분량의 편지를 눈길 한 번 떼지 않고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자신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 과거의 이야기, 나에 대한 첫인상, 앞으로 우리 관계에 대한 다짐. 그런 것들이 담겨 있었다. 그의 글은 매력적이게 솔직했고, 나에게도 깨달음을 주는 관계에 대한 어떤 고찰이 담겨 있었다. 그는 어쩌면 우리가 같은 정신의 방을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 이후로 나는 두 통의 편지를 더 받았고, 우리는 얼마 못가 호가든 생맥주 큰 컵 두 잔을 사이에 두고 헤어졌다. 당시의 나는 그의 편지에 담긴 마음의 깊이를 이해하기기에 너무 어렸다. 그의 말마따나 나는 그와 정신의 방을 공유할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어려운 책을 골라 읽으며 사유하고 글쓰기를 즐기던, 지적 허영심에 가득 차있던 이상적인 나와 누군가와 관계를 이끌어나가는 현실의 나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관계는 끝이 났고 한참이 지난 어느 날 우연찮게 그의 메일을 다시 발견해 읽게 됐을 때. 나는 왜 이런 사람을 더 사랑하지 못했을까, 후회했다. 그때야 그가 쓴 글의 깊이와, 그 사람의 마음의 깊이를 이해했다. 어쩌면 지금 내가 그토록 찾는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이사람이 아니었을까, 후회했다.
나는 요즘도 가끔 그의 편지를 꺼내 읽는다. 정리나 분류따위와 거리가 먼 내 메일함에 유일하게 폴더처리돼 담겨있다. 그렇게 몇번을 반복해서 읽는 이유는 일단 1) 그의 글이 너무 재미있고, 2) 그때 우리의 이야기가 제법 예쁘고, 3)좋은 사람을 만나기에 좋은 사람이지 못했던 나를 돌아보고, 앞으로는 상대의 마음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을만큼 좋은 사람이 되자는 다짐을 굳건히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글은 '4)그와 다시 만나고 싶어서' 따위의 보기가 있는 글은 아니다. 우연히 그가 이 글을 읽고 연락이나 해줬으면 좋겠는 '자니?' 혹은 '잘지내?' 스타일의 미련의 글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나는 한 번 깨진 관계는 다시 붙일 수 없다고 믿는다.
다만 이 글은 뒤늦은 답장이다. 나에게 그런 좋은 글을 선물해줘서 고맙다고, 그때의 내가 당신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다고,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었다고, 사람 대 사람으로 답장을 전하고 싶어서. 그리고 그때의 우리가 함께 즐겨 듣던 노래를 덧붙인다.
#이랑 - 너의 리듬
아마 넌 아직도 이해를 못한것 같아
그래서 넌 그길을 걸으면서 생각하겠지
내가 뭘 놓친걸까 아니면
니가 거짓말을 한걸까
넌 그 길을 걸으면서
너는 사람들이 좀 더 예의가 발랐으면 좋겠지
뭔갈 물어볼때 ‘저기요’라고 말해줬으면 좋겠지
손가락으로 찌르거나 밀치지 않았으면 좋겠지
아마 그게 너의 리듬
아마 그게 너의 리듬
엄마도 이해 못하고
친구들도
가까운 애완동물도
이해못하는
아마 그게 너의 리듬
+
이후로 나온 이랑2집도 참 좋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