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혀 위에 맺힌 돌들이 녹아내리는 시간.
오늘 현관문 앞에 덩그러니 놓인 반품 상자가 유난히 불친절하게 다가왔다.
제대로 밀봉되지 않아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이고, 기존 송장은 깔끔히 제거되어 정체조차 알 수가 없다. 그 위엔 '반품'이라는 사소한 표시조차 없다. 통화마저 안 된다.
잘못 내놓은 반품을 수거했다가 몇 차례 고생을 했기에 몇 번을 다시 확인한다. 지체하는 사이 성질 급한 엘리베이터는 무정하게 문을 닫고 내려가 버렸다. 그저 스마트폰 앱으로 구매 버튼을 눌렀으니, 나머지 번거로운 일은 네가 알아서 하라는 듯이 반품상자는 심통을 한가득 부리는 것만 같다.
구매는 권리처럼 누리면서, 반품은 짐짝처럼 던져둔 모습. 배려 없이 헐벗긴 채 놓인 상자 속에는 반품할 상품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 사이의 무심함이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소비중심'이나 '사용편의'만을 지나치게 쫒다 보니 타인의 고통이나 수고로움을 상상하는 힘이 조금씩 흐릿해지는 것은 아닐까, 소비사회의 민낯을 마주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본주의 경제의 대부인 아담 스미스도 경제를 살리는 '이기심'보다는 '공감(Sympathy)'을 더 소중히 여겼다. 그는 아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공감이 당장 밥 먹여주지는 않지만, 공감이라는 최소한의 온기 없이는 우리 모두의 밥그릇이 결국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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