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활화산(Anxiety) 아래 사는 삶

​불안을 품고 춤을 추는 별이 되다.

by 코나페소아

​시칠리아의 검은 대지,

에트나 화산 기슭에는 대대로 터 잡은 농부들이 있다.


그들은 발밑의 땅이 언제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자신들의 전부를 집어삼킬지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산다. 그럼에도 위태로운 경사면에 집을 짓고, 묵묵히 포도나무를 심었다. 리고 사람들이 화산재가 덮인 척박하고 죽음이 드리워진 땅이라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비옥한 땅으로 회생되어 가장 달콤한 포도가 맺힐 것이라 믿었다.

나의 배송 현장은 겉보기엔 평온한 아파트 단지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묘한 '불안감(Anxiety)'이 존재한다. 이 불안의 정체는 아마도 사람들로부터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을 겪을 수도 있다는 일종의 "두려움"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알랭 드 보통이 말한 사회적 지위를 상실한 것에서 기인하는 "불안(지위 불안)"일지도 모른다.


사회의 계층 사다리 중 가장 낮은 곳, 혹은 그보다 더 아래로 추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나는 매일 두려움이 들끓는 지면 위를 조심스레 걷는다. ​엘리베이터 안은 가장 좁은 밀실이자, 사회적 지위를 냉혹하게 확인하는 잔혹한 심판대다. 물량이 폭주하여 카트 가득 짐을 싣고 층마다 멈춰 서야 했던 어느 날이었다.


"탁, 탁, 탁."

닫힘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연타하던 중년 여성의 손가락 끝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이 났다. 이내 짜증 섞인 탄식이 정적을 갈랐다.

"아, 택배 때문에 또 늦네."

곁에 선 아들은 무안한 듯 엄마의 팔꿈치를 쳤지만, 그녀는 들으라는 듯 중얼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바쁜데, 빨리 가야 하는데..."


​그 순간, 내 안의 휴화산이 꿈틀거렸다. 그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나는 존중받을 자격조차 없는가?"라는 근원적인 수치심이었다. 어른이 된 이후, 세상은 더 이상 존재 자체만으로 박수를 보내지 않는 사실을 체감하며 살아야 한다.


명함의 무게, 연봉의 숫자, 옷의 브랜드가 사람의 등급을 매긴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 땀에 절어 초라해진 사내와 눈이 마주친 순간, 세상이 정한 '성공'의 궤도에서 이탈해 있다는 뜨거운 자괴감이 나를 덮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겪는 사회적 지위상실에서 오는 '불안'의 민낯인 걸까.

​주민들의 냉대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같은 벼랑 끝에 선 택배기사들끼리의 전쟁이다. 1분 1초가 생계인 현장에서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먼저 잡으려 고성을 지르고, 서로를 적으로 돌린다. 부부가 함께 배송하다 쏟아지는 모멸감과 중압감을 견디지 못해 눈물 흘리는 아내를 결국 집에 남겨두고 나왔다는 동료 택배기사의 사연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왜 이토록 서로에게 날을 세우며 위태롭게 흔들려야 하는 걸까.

세상은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한다"는 능력주의의 달콤한 찬가를 부른다. 하지만 뒤집어 보면 그것은 "네가 지금 그 바닥에 있는 건, 네가 게으르고 무능하기 때문"이라는 가장 잔인한 저주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 냉혹하고도 달콤한 주문은 우리에게 '개인사업자'라는 허울 좋은 감투를 씌우면서 완성된다. "일한 만큼 벌어가는 사장님"이라는 칭호는 달콤하다. 하지만, 실상은 노동법의 보호막 하나 없이 거대 시스템에 철저히 종속된 '특수고용노동자', 그것이 우리의 진짜 이름이다.


'특고노동자'.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나는 늘 노동력이 담긴 일회용 깡통을 떠올리곤 다.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노동의 배반>에서 통렬히 지적했듯, 가난은 개인의 나태함 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구조적 모순 속에 있다. 20kg이 넘는 쌀자루를 수십 번 나르고 밥을 굶어가며 달려도, 삶의 고도는 좀처럼 높아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세상은 이 모든 책임을 개인의 탓으로 돌린다. 이 교묘한 착시 속에서 우리는 착취를 '나의 선택'으로, 빈곤을 '나의 무능'으로 오독(誤讀)한다.


아무리 애써도 갇힌 플랫폼의 사슬을 영원히 끊을 수 없다는 서늘한 자각이 들 때면,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박탈감이 치밀어 오른다.


우리는 왜 떠나지 않고 여기에서 일하는 걸까.


불안이 나만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다는 "두려움" 앞에서 요동친다. '사장님'이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을'의 비애가 영원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과 20kg 짐보다 더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는 이 막막함이, 내 안의 분화구를 끊임없이 들쑤시듯 자극한다.

​좁은 탑차 운전석에 몸을 구겨 넣으니, 세상의 냉기와 나 자신의 초라함이 뒤섞인 마그마가 울컥 치솟는다. 그 위험한 순간, 세상이 제 멋대로 나에게 가져다 붙인 가격표를 저 멀리 떼어내고, 나만의 눈으로 나를 다시 읽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나는 내 마음의 풍경을 바라보는 구경꾼일 뿐이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나는 ​미러 속, 입술을 굳게 다문 사내를 구경꾼처럼 가만히 응시한다.


'저 남자는 단순한 실패자가 아니다. 가족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존엄을 위해 정직한 땀을 흘리는 숭고한 노동자다.'


세상이 나를 고작 일회용 참치캔처럼 소모되고 버려질 "택배기사"라고 규정해도, 내가 그 평가에 고개 끄덕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불안은 타인의 시선에 내 영혼의 키를 쥐여줄 때 생겨난다. 나는 내 마음의 주도권을 회수하기로 한다. 이것은 비겁한 정신 승리가 아니다.


나는 지금, 불안을 상대로 나를 지키기 위한, 가장 치열하고도 고요한 철학적 투쟁을 하는 중이다.

​화산이 폭발할 때 가장 먼저 파괴되는 것은 '일상의 안락함'이라는 환상이다. 에트나의 농부들은 언제든 삶이 무너질 수 있음을 직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불안이 그들의 영혼을 깨어있게 만들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상실할 것 같은 불안을 지우려 화산재가 덮인 땅에 집착했다. 화산재가 덮인 땅은 검고 척박해 보이지만, 실은 가장 비옥한 생명을 품고 있었다.


애트나의 농부들이 품은 불안은 단순한 공포와 구분된다. 공포가 대상이 있는 두려움이라면, 그 불안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근원적인 기분, 즉 '고향을 상실한 듯한(Unheimlichkeit)' 감정이다.


엘리베이터의 정적 속에서 내가 느꼈던 그 지독한 소외감, 세상 밖으로 튕겨 나간 듯한 이질감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역설한다. "오직 불안만이 우리를 '본래적 자기'와 대면하게 한다"라고.


세상의 기준에 취해 '남들처럼' 살 때, 우리는 안락하지만 나 자신을 잃어버린 상태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불안이 찾아와 그 안락한 껍데기를 깨부술 때, 우리는 비로소 발가벗은 단독자, 자유로운 영혼으로 홀로 서게 된다는 의미였다.


"아, 나는 타인의 시선으로 빚어진 인형이 아니구나. 나는 내 삶을 책임져야 하는 유일한 존재구나."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노동 속에서도,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가치를 의식하며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삶이 된다.


나에게 찾아온 이 불안 또한 저주가 아니다. 이 불안 덕분에 나는 껍데기뿐인 안정을 버리고, 거칠지만 택배세상을 통해 진실한 나만의 땅을 경작할 기회를 얻었다.


​내일도 누군가는 20kg이 넘는 몰짐을 주문할 것이고, 나는 또다시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숨 가쁘게 오르내릴 것이다.


불합리한 저단가 배송료와 타인의 날 선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해 파고들 것이다. 내 안의 활화산은 멈추지 않고 그르렁거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불안이 분출되는 상황들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이 불안한 감정들에게서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대신 묵묵히 그 열기를 견디며 일상의 포도를 키우며 탐스러운 결실을 기대하는 '감정의 농부'로 살기로 했다.

문득 수수께끼 같은 문장 하나가 뇌리를 스친다.


​"춤추는 별을 잉태하려면, 반드시 내면에 혼돈을 지녀야 한다."


​내 안에서 요동치는 이 불안과 분노, 박탈감이라는 뜨거운 마그마가 단순한 파괴의 에너지가 아니라면? 이것이 언젠가 나만의 '춤추는 별'을 쏘아 올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재료라면?


어쩌면 진정한 평온이란 혼돈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그 혼돈을 연료 삼아 타오르는 가장 강렬하고도 생기가 넘치는 삶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탑차의 시동을 켠다. 엔진의 진동과 함께 내 안의 마그마도 다시 거대한 진동과 함께 웅웅 거리기 시작한다.


나의 이 혼돈은 지금, 과연 어떤 별을 잉태하고 있는 걸까?


​몹시도 추운 오늘 아침, 힘겨운 까대기 중에 센터 너머로 본 눈 덮인 풍경은 왜 이리 시리도록 아름다운지.


7년 전 택배초기, 녹초가 된 몸으로 가족들과 배송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어두운 밤하늘에 너무나 크고 노랗게 빛을 내며 우리 모두를 빨아들일 것만 같던 보름달처럼 말이다.


그 시린 아름다움을 되새기던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는 늘 불안 위에 서 있지만, 동시에 그것을 품고 춤추는 별처럼 살아가고 있음을, 눈이 시리도록 빛을 발산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말이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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