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의 침묵 속에 택배박스를 쌓는다.

아홉 번째 파도가 지나간 자리, 나만의 정원에서 시작된 고요한 저항.

by 코나페소아


응답 없는 침묵이 밀어 올린 '아홉 번째 파도'
태초의 창조는 아무것도 없는 늪, 끝없는 공허, 칠흑 같은 어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습한 뻘 속에 발이 묶인 채 시작된 그 서막 속에서, 신은 혼돈과 깊은 침묵을 엮어 찬연한 빛을 만들고 질서를 부여했다.


​로맹 가리가 상상한 '파라카스'의 모래해변 위로 수만 킬로미터를 날아온 철새들이 연이어 추락한다. 그곳은 더 이상 날아갈 곳 없는 세상의 막다른 경계였다. 그 해변을 향해 모든 것을 끝장낼 듯한 거대한 ‘아홉 번째 파도’가 밀려든다. 뱃사람들의 전설에서 아홉 번째 파도는 가장 거대하고 치명적인 최후의 일격이다.


우리 역시 각자의 안식처인 '파라카스' 해변을 품은 채 살아간다. 하지만 필사적인 날갯짓 끝에 도달한 세상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모든 기도를 집어삼키는 깊고도 기나긴 침묵의 파도일지 모른다.


빗장공동체: 숫자로 박제된 도시의 계급도
​오늘의 도시는 혼돈과 소음,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침묵 속에 빠져버렸다.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허공을 더듬으며 묻는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 혹은 그의 깊은 침묵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런 도시를 지배하는 것은 폐쇄된 경계다. 닫힌 경계 안에서 '비틀어진 목재'와 같은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신들만의 '빗장공동체'를 만들어낸다. 이 경계를 따라 도시의 공기는 결을 달리한다. 도심의 심장부가 정제된 향수처럼 매끄러운 '여유'를 머금는다면, 외곽의 막다른 길은 타인의 거친 숨결과 비릿한 생존의 냄새가 뒤섞여 탁해지기 때문이다.

도시는 아파트로의 편중된 삶을 부추기며 점차 비틀려 가고, 그 경계를 따라 차등과 차별이 흐른다. 우리는 이 노골적인 분리를 ‘계급’이라 부르는 대신, ‘통장 잔고’나 ‘주택 평수’ 같은 건조한 숫자로 교묘히 바꿔서 표현한다. 이 거대한 베팅보드 위에서 숫자가 0에 가까워지는 순간, 존재 자체가 소거될 것이라는 공포를 우리는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다. 빗장공동체에서 밀려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새롭게 솟아오른 경계의 벽 앞에서 매번 원점을 맴도는 좌절을 맛볼 뿐이다.


1992년, 서울 금호동 산동네의 단칸방은 아파트를 향한 끝없는 나의 거주행로의 시작이었다. 얼어붙은 경사길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 전봇대를 꼭 붙들던 차가운 감촉, 어깨를 비비며 지나치던 좁은 골목길까지 재개발의 열풍 속에 사라졌다. 상도동 재개발구역 능선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아파트와 빌라, 단독주택이라는 확연한 경계로 나뉘어 있었고, 그 풍경 속 당당히 우뚝 선 아파트는 내가 도달해야 할 신분적 이정표이자 내가 날아가야 할 '파라카스' 해변이었다. 도시의 지형도를 단순히 거주지별로 나누듯, 나 역시 성공과 실패라는 투박한 흑백의 잣대로 내 삶을 어설프게 재단하려 했다.



다정한 이방인의 골목: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은 온기

택배 차의 육중한 뒷문을 열면, 밤새 갇혀 있던 서늘한 냉기와 눅눅한 종이 박스 냄새가 일시에 쏟아져 나온다. 그 비릿한 현장의 냄새를 맡으며 택배기사인 나는 도시의 경계들 안팎을 부지런히 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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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택배차 공간은 나를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세상 누구보다 가까이서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전망대'입니다. 저는 세상을 읽으며 글을 쓰는 몸글 사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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