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아버지의 낡은 수첩과 아들의 할리데이비슨

바다는 ​돈의 방패 밖에서도 아주 넓고 평온했다.

by 코나페소아


아버지의 가슴팍 왼쪽 주머니에는 낡은 마을금고 수첩이 들어 있었고, 큰 아들의 스마트폰 화면 속에는 번쩍이는 할리데이비슨을 배경으로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이제 돈과 얽힌 우리 집안의 사연을 시작하겠다.

생의 밑바닥에서 마주한 진실들

​비가 몹시도 내리는 날, 빌라를 돌며 배송을 하던 중이었다. 박스들이 비에 젖을까 신경이 쓰여 발걸음을 재촉하지만, 가파른 빌라 계단은 이끼 낀 돌덩이처럼 미끄러웠다. 한순간 발밑이 허공을 찼다.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나는 빌라 계단 위로 고꾸라졌다. 충격으로 숨을 쉬지 못한 채, 한동안 차갑고 어두운 빌라의 1층 타일 위에 엎드려 낮은 신음을 뱉어냈다.


아련히. 닫혀 있던 철문 하나가 조심스레 열리는 인기척이 들렸다. 누군가 고개를 내밀어 나를 살피는 듯하더니, 이내 ‘철컹’ 하고 매몰차게 문을 닫았다. 그 무심한 문소리는 나는 지금 내 삶의 가장 낮은 지점까지 내려와 있음을 알려주는 경고음처럼 들렸다. 포근하고 안전한 돈의 방패를 벗어난 바깥세상은 이처럼 차갑게 험하고 서러운 곳이었다. 간신히 추스르고 빌라 문을 나서니 뺨을 타고 흐르는 빗물의 온도가 낯설기만 했다. 택배를 돌리다가 나를 바라본 아내와 아들이 놀라서 다가오는 모습과 놀란 목소리들이 아득하니 렸다.


문을 닫고 들어간 그 익명의 타인처럼, 돈에 취한 나 역시 상처 입은 가족들을 보면서도 이렇게 차갑게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빗물이 고인 웅덩이에 비친 내 모습이 흔들린다.


'나는 무엇을 기대했을까?' 죽어가던 노년의 '스토너'가 스스로에게 던진 이 질문이 되살아났다. 우리는 평생 세상에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갈구하며 산다. 에릭 호퍼의 말처럼, 평범한 일상이 엄마의 품 안인 것을 망각한 채 고립된 승리만을 갈망해 온 것은 아니었는지. 꽃의 아름다움을 아는 패배자가 되기보다, 돈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진짜 소중한 것들 까맣게 외면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이 차갑고 어두운 빌라 바닥에 누워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낡은 마을금고 수첩과 앙상한 유산

​나의 아버지는 스물일곱 젊은 시절에 파주에서 한옥 세 채와 쌀집, 그리고 마을금고까지 소유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러나 내가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모든 영광은 파산이라는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고, 부산으로 도망치듯 피신해야 했다. 그 후 평생 택시를 몰았던 아버지의 가슴팍 주머니에는 항상 너덜너덜해진 ‘마을금고 수첩’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잃어버린 과거의 영광에 대한 미련이자, 힘겨운 현실을 벗어나 다시 안전한 돈의 방주 안에 탑승할 수 있으리라는 처절하고도 간절한 희망이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평생 술과 담배도 하지 않고 성실하게 운전대를 잡으셨지만, 사채를 무서워하지 않는 씀씀이로 인해 집안은 더 깊은 빚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런 집안의 ​장남인 내게 돈을 번다는 것은 선택이 아닌 숙명이었다. 빚에 짓눌린 집안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강박은 미래를 향한 사소한 꿈조차 사치스러웠다. 그저 돈을 벌어 아버지의 빚을 갚아야 했다. 사업에 뛰어들어 맨몸으로 자수성가한 성공한 사장이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 밥숟가락도 놓은 채 회사와 현장을 뛰어다녔고, 그 사이 가족들은 늘 돈과 성공이라는 장막 뒤로 가려져 버렸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코나페소아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제 택배차 공간은 나를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세상 누구보다 가까이서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전망대'입니다. 저는 세상을 읽으며 글을 쓰는 몸글 사유가입니다.

146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6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16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04화04 신의 침묵 속에 택배박스를 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