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축아파트인데도 어쩐지 늦는다 했다. 인테리어 공사를 할 동안 다른 곳에서 숨어 지냈나 보다.
#1. 설마 했던 첫 만남
신혼집에 산 지 두어 달이 지났을까. 여느 때처럼 퇴근 후 저녁밥을 먹고 빨래를 돌리러 세탁실 문을 열었다. 흰 빨래를 돌리는 날이라 한창 세탁 바구니에서 흐리멍텅한 깔들의 옷들을 세탁기에 넣고 있을 때였다.
응? 저게 뭐지 후드끈인가?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 집에서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기에 츄리닝 바지나 후드티에서 빠진 끈이 뭉쳐있나 싶었다. 몸을 숙여 더 가까이 가봤지만.. 슬픈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는가.
"악 여보!!!!"
이때만 해도 바퀴벌레를 잡는 약조차 집에 두지 않았었다. 벌레라면 기절초풍하는 나를 위해 남편이 출동했지만, 약도 없이 설레발쳤다간 구석으로 도망갈 수 있어 그는 신중히 움직였다. 깊이가 있는 일회용 접시로 살며시덮어둔 후 마트로 달려가 살충제 스프레이를사왔다.
#2. 훗, 이제 시작이야
세탁실에서의 첫 만남을 시작으로 앞베란다, 뒷베란다 할 것 없이 문만 열면 그들과마주했다. 처음엔 한 마리만 만나던 것도 점점 여러 마리를 한 번에 마주치는 날이 늘어났다.
"여보!! 스프레이!!"
제발 방에만 안 들어오길 간절히 바랬건만. 작은방에서 야근을 하던 나를 남편이 다급히 불렀다. 안방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보다 천장에 무언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단다. 역시나 바퀴였다. 크기는 어찌나 큰지, 직접 보진 않았지만 남편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날 이후 거실에서도 새끼로 보이는 작은 아이들도 간간히 발견되었다. 재택근무에, 작은 개미에도 호들갑 떠는 내겐 점점 최악의집이 되어갔다.
#3. 난 너희를 초대한 적이없어
일을 할 때도, 빨래를 돌릴 때도, 심지어 잠을 잘 때도 편히 잘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서도 창문이 잘 닫혔는지, 구석지에 뭐가 없는지 살피기 바빴다. 인터넷에서 본 대로 지나갈만한 길에 바르는 약도 발라보고 스프레이도 뿌려봤지만 잊을만하면 마주치는 통에 다른 방안이 필요했다.
바퀴벌레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려는 습성이 있다. 2층 이상에 산다면, 아랫집에서 올라온 바퀴일 가능성이 크다. 아랫집과 통하는 통로를 차단하라.
우린 지금까지 우리집 안에서의 지나가는 길, 머물만한 구석지만 신경 쓰고 있었는데 아랫집과의 통로였다니.
생각해보니 진짜 그랬다. 첫 만남은 세탁실, 자주 마주친 곳은 베란다. 이 두 곳엔 배수구가 있다. 이 배수구를 원천 차단해야 더 이상 올라오지 못할 것이다. 물은 내려가게 해야 하기 때문에 이것저것 찾아본 끝에 '트랩'을 설치하기로 했다.
#4. 10만 원으로 찾은 평화
인터넷에서 구매 후 셀프 설치를 할 수도 있었지만 처음 설치해보기도 하고 완벽한 차단을 위해 전문가를 부르기로 했다. 애용하는 숨고 어플로 기사님을 불렀다.
설치하는 이유를 설명드리고 인터넷으로 알게 된 지식이 맞는지여쭈니 90%는 배수관, 우수관을 타고 올라오고 나머지 10% 정도만 외부에서 유입된다고 하셨다.
출처 : 네이버 스마트스토어
위 사진처럼 물은 내려갈 수 있게 하면서 아래에서는 올라오지 못하게 차단막이 있는 트랩을 총 10만 원을 내고 세탁실 배수구와 베란다 우수관 두곳에 설치했다.
과연 저 작은 트랩 따위로 해결이 될지 반신반의했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설치 이후 1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집에서 바퀴벌레를 마주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이제는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아랫집은 우리 땜에 이제 난리났겠네."
10만 원으로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니.. 설치비가 좀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돈이 전혀 아깝지 않다.
혹시 구축아파트에서 살며 바퀴벌레로 고통받고 있다면 고민 말고 트랩을 설치하시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