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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미니 Oct 19. 2024

이혼일기(83)

혼자서도 잘해요

어떻게 하면 운동회를 초라하지 않게 참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 이런 경우, 방법은 물건과 사람의 두 측면으로 생각하면 해야할 일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장비>

끝장나는 도시락을 싸자. 뭐 어차피 아이들끼리 옹기종기 앉을 것은 아니니 토끼모양 사자모양은 안해도 되겠지만, 과일과 떡, 튀김 등등등 종류별로 구비하면 된다. 그리고 깨끗하고 도톰하고 아무튼 좋은 돗자리, 아...! 재작년에 시험에 붙고 나서 아기랑 놀러가겠다고 야심차게 샀던 파라솔과 의자 세트가 있지! 좋은 것은 아니지만 하얗고 깨끗하고 암튼 보기에 좋으니 그것도 챙겨가야 겠다!


 <사람>  

.....미친 척 하고, 아이 아빠를 불러볼까........ 내 관심사는 오직 아이이다. 사실 그리고 이제 남편에 대한 미움이나 분노는 잊혀진 지 오래다. 나와 아이의 생활은 너무 평온하고 만족스러워서 그가 생각날 틈이 없다. 솔직히 나는 그의 얼굴을 본다고 나쁠 것이 없었다. 아빠가 온다고 아이가 즐거워만 한다면야 부를 의향은 얼마든지 있다.


 ... 하지만, 사람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에 사람간의 관계란, 억겁의 경우의 수를 가지고 파란만장하게 펼쳐진다. 간단하지 않은 두 사람이 얽히니, 세제곱 네제곱이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지난 여름 예배를 드리고 관사로 돌아온 주일, 산책 겸 아이스크림을 사러 나갔다가 아이가 좋아하는 체리마루 아이스바를 들고 관사에 붙어 있는 공원 입구로 들어섰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고, 여름이었지만 해가 비스듬해 걸을만 하게 더운 날씨라 그랬을까. 저절로 입이 떨어진다.


 아가. 아빠랑 엄마랑은 사정이 생겨서 따로따로 살기로 했어. 근데 그래도 아빠도 엄마도 우리 아가를 너무너무 사랑해. 그건 절대로 변하지 않아. 


 말하며 아이를 흘긋거리고 보니, 징검다리처럼 박힌 돌을 팔랑팔랑 뛰어넘으며 으응. 하고 대답한 뒤에 다시 아이스바를 핥아 먹는다.


 이제 엄마 운전도 하고 그러니까 재밌는 데 많이 다니자! 다음 주에는, 물고기 보러 아쿠아리움에 갈까? 


 응 엄마 근데 무슨 사정이 생겼다고...?


 엄마가 시험에 붙어서 좋은 직장을 갖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아빠와 멀리 떨어져서 지내야하는데 아빠가 그걸 힘들어해서, 그래서 따로 지내게 되었다는 이야기에 아이는 해맑은 목소리로 여러가지를 물어보았다. 그럼 아빠가 여기 와서 살면 안되는 거냐. 그럼 아빠가 사는 집에는 누가 사는 거냐


 아이에게 희망고문을 하지 않기 위하여. 잘라 말했다. 엄마는 우리 아가만 정말 많이 사랑해. 아빠와 엄마가 같이 있기는 어려워졌으니, 우리 아가 아빠한테 가서 사랑 많-이 받고, 또 엄마한테 와서 하비 함미랑 행복하게 살자. 고 이야기해서 손가락까지 걸었다.


 덥고 습한 날씨에 아이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이 녹아 뚝뚝 떨어진다. 바닥에 떨어지는 분홍색 얼룩들은 못내 아쉽고 찜찜해도 지나쳐 가면 어느새 지워져 있겠지. 시간이란 그런 것이다.


 지금도 그 길을 갈 때면 물어본다. 엄마 어떤 사정이 생겼다고 했었지? 그리고 그 이후 아이는 아빠와 엄마와 함께 살고 싶다고 울지 않았다. 그리고 밝아졌다. 어린이집에서 멍하니 있는 시간도 없고 짜증도 줄었다. 아빠를 즐겁게 만나러 가서 또 환히 웃으며 돌아왔다.


 그 작은 가슴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아마도 했을 지 모를 자책도 덜어내고, 상황을 그대로 안아버린 가벼운 아이의 태도를 보며 참 감사하고 다행이다. 생각했는데,


 1) 아빠가 와서 엄마랑 같이 운동회에 참여한다면, 아이는 혼란스러울 것이다. 떨어져 있기로 했으면서 왜 같이 있는 지 궁금할 것이고. 그러다보면 또 뭉게뭉게 이러다 같이 살 수 있는 것 아닐까 희망도 생겨날 수 있다. 그리고, 아빠와 엄마가 둘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는 걸 보는 것도 괴로운 일이다. 우리는 미국 부부가 아니라서 헤어지고 친구처럼 지낼 수 없다. 원수지간이 되었다. 그건 내가 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2) 그는 내가 본인을 부정수급으로 신고했다고 비난했다. 그래서 매형과 형사 입건 되었고  둘다 건강을 망치고 어머니도 몸져 누워버렸고 등등 시댁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고 분노했다. 지금 자신의 엄마가 피땀흘려 모은 재산 한귀퉁이를 헐어가려는 아주 괘씸하고 나쁜 X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굳이 그 생각을 돌이키게 할 의지도 여유도 있지 않다. 얼굴을 마주보고 쿨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관계가, 절대 아니다.


3) 게다가 아직 재판이 끝나지 않았는데, 둘이 그러고 운동회에 갔었단 이야기를 그가 재판부에 한다면. 재판부는 뭐라고 생각할까. 얘네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인지상정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여기는 미국이 아니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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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크에서, 오늘 새벽에 배송되어온 폴딩카트를 꺼낸다. 살짝 흥분되고 긴장된 마음으로 착착착 접힌 부분을 펴고 바닥을 깔고 돗자리와 파라솔과 도시락을 넣고 뚜껑을 닫고, 그 위에 아이를 앉히고.


아가 꼭 잡아. 엄마가 살살살 갈게 꼭 꼭 잡아야 해!


 운동회가 열리는 공원의 주차장에서 운동회 장소까지는 걸어서 10여분. 새로 산 폴딩카트는 4개 바퀴가 모두 360도 회전한다며 힘이 덜 든다고 했다.


 달달달달. 끌고가며, 되뇌인다.


 혼자서도 잘해요.


ㅡㅡㅡㅡ


촌스럽게 말하면 미국이고 ㅋ 북미나 유럽권 부부들은 안 이러겠지요.


아이상담이나 어린이집 선생님 모두 지금쯤은 아이가 상황에 대해 인지할 때이니 간단하개라도 설명을 해주는 것이 좋을 거라고 하셨어요. 아니면 자기 때문이라고 자책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이죠.


 사실 저는 항상 아빠를 좋은 사람으로 이야기해서 아이가 자책을 할 거라고 생각은 안해봤는데.. 그래도, 아이 입장에서는 어떨 지 모르니 정리를 해주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다 지나가며 보았지만, 결혼지옥에 이혼하고도 아빠를 자주 만나고 그 때마다 으르렁대는 엄마가 나왔던 것 같아요. 아이들은 아빠를 만났다는 것만 보면 좋겠지만... 그 장점 말고도 너무 많은 부작용에 시달립니다. 아빠와 엄마가 싸우는 가운데에서 눈치를 본다든가. 아빠와 엄마의 관계를 혼란스러워 한다던가. 하는 모습들 말이죠.


 여러 생각들 끝에 현실적으로는 절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한사람의 마음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고, 아직 우리 정서에는 참 힘든 일이에요. 여러모로.


 


시월의 토요일 아침.

 참 좋은 날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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