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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규관 Feb 03. 2023

김수영 시가 어렵다고?(5)

―멀리 보고 있는 것이 타당한 책

(「가까이할 수 없는 서적」을 읽으려면 다른 주변을 살필 필요가 있다. 자세한 것은 책에서 밝히기로 하고, 일단은...)     


「가까이할 수 없는 서적」은 “용이하게 찾아갈 수 없는 나라에서 온” 책을 일러 “주변머리 없는 사람이” “만지면은 죽어 버릴 듯 말 듯 되는 책”이라고 부릅니다. “캘리포니아라는 곳에서” 온 책이죠. 미국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우리는 아직 그것을 주체적으로 다룰 “주변머리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식민지를 통해 정신적, 문화적 전통이 깨져버린 상태에서 “바람 속에 휘날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폐허 위에 ‘아메리카 문화’가 들이닥친 것인데, 현실적으로 그것을 거부할 힘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덥석 안을 수도 없습니다. 딜레마라기보다는 아포리아(aporia)입니다. 난제죠, 난제. 딜레마는 다른 길을 선택할 여지라도 있는데, 아포리아 앞에서 우리의 실존은 얼어붙기 마련입니다. 창조적 도약이 아니고는 넘어설 수 없는 상황이 아포리아인데, 지금 김수영은 거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단지 ‘아메리카 문화’만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총체적 난국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이때 김수영은 여러모로 미숙한 상태였고 ‘바로 보기’ 이상의 역량은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안 볼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는 “괴로움도 모르고” 그러니까 아포리아를 망각하고 보긴 봅니다. 그러나 “멀리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래도 이게 타당한 것 같다고 자기를 위로합니다.     


괴로움도 모르고

나는 이 책을 멀리 보고 있다

그저 멀리 보고 있는 것이 타당한 것이므로

나는 괴롭다

오― 그와 같이 이 서적은 있다     


괴로움을 잠시 잊고 보긴 보는데, 멀리 봅니다. 그리고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시 또 괴롭습니다. “오― 그와 같이 이 서적 있다”(강조―인용자)는 시적 화자의 괴로움을 극대화시키는 구절입니다. ‘서적이 있다’가 아니라 ‘서적은 있다’입니다. ‘이’와 ‘은’의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대상을 가리킬 때 쓰는 조사인데 비해 ‘은’은 문장의 주어나 진술 주체가 자기를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서 확립하는 데 쓰이는 조사입니다. 또 “이”라는 지시대명사가 “은”이라는 조사를 강조하고 있죠. 이렇게 읽을 때 “오―” 같은 영탄사가 주는 느낌이 확실히 살아납니다.      


제가 자구 하나하나에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은, 먼저 시가 주는 느낌이 중요하다는 차원이었고요, 그것을 헤칠 수 있는 선을 넘지 말라는 뜻이지 자구를 무시하라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김수영 처한 아포리아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런 까다로운 읽기가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김수영은 또 뭐라고 합니까?      


연해 나는 괴로움으로 어찌할 수 없이

이를 깨물고 있네!

가까이할 수 없는 서적이여

가까이할 수 없는 서적이여     


“오― 그와 같이 이 서적 있다”에서 마지막까지 김수영의 괴로움은 반복, 증폭됩니다. 그렇죠? 시인이 같은 표현을 연이어 반복할 때는, 대략 두 가지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둘 다 감정의 분출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 쓰지만, 강조하기 위해서 반복하거나 아니면 괴롭거나 체념의 감정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에서는 당연히 후자겠지요.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심지어 “이를 깨물고 있네”에 느낌표를 붙이고 “가까이할 수 없는 서적이여”를 반복합니다.      


이만하면 김수영이 이 시를 쓰면서 가진 감정이 무엇인지 느낌이 오지요? 수치심이지 않을까요? 「연극하다가 시로 전향」에서 뭐라고 했나요. “해방 후의 혼란기”가 자신에게는 “텐더포인트”였고 동시에 “지독한 치욕의 시대”라고 했잖아요. 「가까이할 수 없는 서적」은, 저는 이렇게 읽으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가끔은 시 한 편을 만족스럽게(?) 해석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작품을 통해 시인이 어떤 상태이며, 그 상태를 시인이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지, 혹은 극복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일입니다.      


이런 면에서 김수영의 시는 우리에게 익숙한 서정시와는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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