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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규관 Feb 08. 2023

우리 안에는 “응결한 물”이 있는가?

―김수영 시가 어렵다고?(6)

(이번 연재부터는 부제와 주제를 바꿉니다.)     

 

「아메리카 타임지」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현재를 바라보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인숙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체험과 사랑의 쓰라린 상처, 그리고 만주 경험이 과거를 이루고 있다면, “와사의 정치가”로 대변되는 현실에 대한 뜨거운 응시가 현재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실 이 작품이 시적으로 뛰어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여러 모로 흥미로운 작품인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2연이 없었으면 그냥 산문적 진술을 넘어설 수 없는 작품입니다.      


1연에서는 만주 경험과 대한해협을 건너간 사실을 술회하고 있는데, 2연에서 그간의 도정에 대해 “수없이 길을 걸어왔다”고 말합니다.     


기회와 유적 그리고 능금

올바로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나는 수없이 길을 걸어왔다

그리하여 응결한 물이 떨어진다

바위를 문다     


여기서 “유적”은 한자로 ‘油滴’인데 재개정판에는 표기가 안 되어 있습니다. ‘기름방울’이죠. “유적”과 “능금”은 시적인 은유 같습니다. 그게 무엇을 가리키는지 굳이 따지지 말고 은유로 음미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삶의 기회,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유적 그리고 능금”을 찾아 “올바로 정신을 가다듬으면서/나는 수없이 길을 걸어왔다”는 것입니다.      


「공자의 생활난」과 겹쳐지는 지점이 있지 않나요? “올바로 정신을 가다듬으면서”에서 말입니다. ‘바로 보기’의 다른 표현으로 읽힙니다. 그러한 태도와 마음으로 “수없이 길을 걸어”온 결과 “응결한 물”이 되었다는 겁니다. “응결한 물”은 그런데 무엇일까요? 결로 현상으로 생긴 물방울이나 이슬을 한번 떠올려 보죠. “떨어진다”고 했으니 아마 어딘가에 맺힌 물방울의 이미지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풀어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무언가를 찾아서 나는, 정신을 올바로 가다듬으면서 수없이 방황을 하며 걸어왔더니 내게 응결된 무엇이 생겼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떨어진다. 그런데 어디에 떨어지는가? “바위” 위에 떨어진다. 떨어져서 “바위를 문다”.     

 

고작 물방울로 단단한 바위를 문다고 합니다. 여기서 무엇이 느껴집니까? 고독이 느껴지나요, 의지가 느껴지나요? 김수영이 처한 세계는 단단한 바위입니다. 물방울 정도로 부서지지 않죠. 하지만 시는 어쩌면 “응결한 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응결한 물”에는 바위를 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년에 쓴 「시여, 침을 뱉어라」의 다음 구절이 자동적으로 떠오릅니다.      


낙숫물로 바위를 뚫을 수 있듯이, 이런 시인의 헛소리가 헛소리가 아닐 때가 온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하고 외우다 보니 헛소리가 참말이 될 때의 경이. 그것이 나무아미타불의 기적이고 시의 기적이다. 이런 기적이 한 편의 시를 이루고, 그러한 시의 축적이 진정한 민족의 역사의 기점이 된다.  

   

다음 3연에 “와사(瓦斯) 정치가여”가 나오는데, 와사(瓦斯)는 가스(gas)의 일본식 표기라고 설명이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일까요? 이해가 됩니까?     


제가 들은 어느 연구자의 말에 의하면, 여기서 ‘사(斯)’는 ‘실 사(絲)’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오래돼서 기억이 충분치는 않지만, 어떤 재료를 불에 그을리며 방사(紡絲)를 하면 고급스러운 실이 나오는데 그게 ‘와사’랍니다. 와사로 만든 천으로 옷을 해 입는 고위층을 “와사의 정치가”로 볼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옛날에 그런 방사 방법이 있었고 실제 그 실로 만든 옷을 해 입었다고 합니다.      


만일 이 추정이 맞다면 “와사”의 한자 표기는 오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하면, 해방공간의 빈궁한 민중과 화려하고 부유한 지도층의 대비가 이루어지기는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을 “바위”로 인식하고 표현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잠정적으로 이렇게 해석하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뱃전에 머리 대고 울던 것은 여인을 위해서가 아니다”고 하는데, 물론 김수영 자신이 “아메리카에서 돌아오던 길”을 경험한 적은 없습니다. 어쩌면 고인숙이 미국으로 떠난 일(언제 떠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과 ‘아메리카 타임’이라는 잡지의 이미지를 섞어 놨을 수도 있습니다. 시적 허구인 것이죠.    

  

“뱃전에 머리 대고 울던 것은 여인을 위해서가 아니다”라는 진술은 비록 사랑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상처만 가득 안고 돌아왔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신은 다른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는 뜻도 됩니다. 사랑의 상처를 승화한 것인지 아니면 일본 경험에서 다른 무엇을 받아들였는지는 굳이 해명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김수영이 일본에서 연극이라는 예술을 만난 것은 사실입니다. 분명한 것은 개인적인 사랑의 상처에 머물지 않으려는 정신입니다.      


여기서 “활자”와 ‘가까이할 수 없는 서적’은 의미상 겹치기도 하는데, 여기서 “활자”는 ‘아메리카 타임지’의 활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해방공간의 기름진 지도층과 ‘아메리카 타임지’로 표상되는 아메리카 문화가 또 겹쳐지죠. 거칠게 말해서, 그 당시 미군정이 통치하는 현실을 “응결한 물”인 자신이 “응시”하고 있다는 풀이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견고한 “바위”입니다. 그리고 “응시”와 ‘바로 보기’는 결국 같은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로 보기’는 의지나 신념으로만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자신 안에 “응결한 물”이 있어야 바로 볼 수 있는 힘이 고입니다. 그리고 이 힘은 계속 유지되기도 해야지만 동시에 언제나 새로워져야 합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언제나 “응결한 물”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산산이 부서지거나 아주 비루해져 버리죠. 하지만 “응결한 물”을 간직하고 있다면 승리자는 못 된다 하더라도 패배자도 되지 않습니다. 아니, 패배자가 되어도 긍지에 찬 패배자가 됩니다. 현실에서는 패배해도 결국 승리도 패배도 없는 역사가 가능하다는 빛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 시이기도 합니다.      


시는 고작 자신의 감정을 풀어놓는 것이 아닙니다. 초월을 꿈꾸게 하는 것이죠. 이 초월은 그러나 자신의 짐과 책무를 남에게 떠넘겨서 될 일이 아닙니다. 김수영의 시는 시대로 비판적으로 읽어야 하겠지만, ‘시인’ 김수영이 보여주었던 삶의 태도도 우리는 살펴볼 것입니다. 물론 그 태도는 시를 통해서 드러난 태도입니다.  

    

김수영은 훗날 「아메리카 타임지」에 대해서 스스로 낙제점을 줍니다. 이 작품 자체가 좋다고는 볼 수 없는 건 확실한데, 「연극하다가 시로 전향」에서 스스로 “이 사화집에 실린 두 편의 작품도 그 후 나의 마음의 작품 목록으로부터 깨끗이 지워버렸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두 작품은 「공자의 생활난」과 「아메리카 타임지」입니다. 「묘정의 노래」부터 「아메리카 타임지」까지에 얽힌 이야기는 이 산문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일독해보시면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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