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세탁기
우리 집엔 괴물 세탁기가 산다.
처음엔 녀석이 평범한 세탁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더욱 놀라운 건 엄마와 아빠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생활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아마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서 익숙해졌거나 애완괴물처럼 녀석을 키우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처음엔 참아보려 했지만 녀석이 계속해서 내 것을 먹어 치웠기 때문에 어떻게든 녀석을 물리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녀석이 괴물인 줄 몰랐을 땐 관심도 없었는데 엄마, 아빠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부터 녀석이 괴물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때부터 녀석을 물리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날 나는 일찍 잠들었던 탓에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었다.
내가 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의 일이다.
"재훈 엄마~ 또 양말이 짝짝이네~ 짝짝이 양말 어디에 모아뒀어?"
"침대 서랍 아래쪽에 찾아봐요."
"에휴~ 이놈의 양말은~ 매번 이러네...." 아빠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이번에도 세탁기가 먹은 모양이에요. 하긴 오래되긴 했지!" 엄마가 중얼거리듯 말씀하셨다.
"그러게, 오래되긴 했지. 결혼할 때 가지고 온 거니까."
"이참에 새것으로 바꿀까?" 엄마가 아빠를 힐끗 쳐다보며 말씀하셨다.
"고장 나면 그때 바꾸자. 아직은 쓸 만하잖아!" 아빠가 빨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씀하셨다.
'뭐! 세탁기가 양말을 먹는다고?'
막 잠에서 깨어나 들은 이야기지만 분명 두 분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엄마! 세탁기가 양말도 먹어?" 양손으로 눈을 비비며 물었다.
"응! 그러네~ 아무래도 바꿀 때가 된 것 같네~"
내가 물었지만 엄마는 아빠 쪽을 쳐다보며 말씀하셨다.
'세탁기가 양말을 먹다니.... 녀석은 분명 괴물임이 확실했다.'
나는 괴물에 대해 더 묻고 싶었지만 유치원 통학버스 오기 전 밥도 먹어야 했고 세수는 물론 옷도 갈아입어야 했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사실 엄마가 처음 일어나라고 했을 때 일어났으면 조금의 여유쯤은 생겼을 테지만 난 한 번에 일어나는 법이 없었고 그랬기 때문에 나의 아침은 언제나 바빴다.
밥을 먹으며 옷을 입었고 양치가 끝나기 무섭게 엄마 손에 이끌려 유치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내년이면 더 이상 통학버스를 타지 않아도 된다.
내가 학교에 가기 때문이다.
가끔이지만 내가 늦장을 부릴 때면 "내년이면 형아가 되는데 이러면 형아 안 돼"라며 엄마가 말씀하신다.
나는 엄마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너무 싫다.
늦는다고 형아가 되지 않는다는 말은 엄마가 겁주려고 하는 말이라는 걸 아빠에게 들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치원에 도착했을 때 지혜반 선생님이 구연동화를 들려주었지만 난 집중하지 못하고 세탁기 괴물 생각에 잠겨 있었다.
주로 어떻게 하면 녀석을 물리칠 수 있는가였지만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한숨만 나왔다.
"야! 뭐 해?" 내가 그런 고민에 빠져있을 때 친구 유래가 다가와 물었다.
"응, 그냥 생각하고 있었어!"
"생각? 무슨 생각?" 유래가 나를 가만히 쳐다보며 물었다.
"어~ 그게 말이야~ 어떻게 하면 괴물을 물리칠 수 있는지 생각하고 있었어."
"괴물? 무슨 괴물?" 유래가 내쪽으로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쉿! 이건 비밀인데.... 우리 집에 괴물이 있어. 그래서 그걸 물리칠 방법을 찾고 있는 거야."
"뭐!!! 어떻게 생겼는데?" 놀란 유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지금은 세탁기로 변신해 있어서 진짜 모습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라! 아니 어쩌면 세탁기 모습이 진짜 괴물의 모습일지도 모르겠어."
"뭐!!!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막 움직여?" 호기심이 생긴 유래는 더 바짝 다가서며 조용히 물었다.
"아니! 얼마 전에 내 양말이 없어졌는데 엄마 말로는 그 녀석이 먹은 거래."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유래 귀에다 나직이 속삭이듯 말했다.
"아이고~ 더럽게 왜? 양말을 먹는데…. 앗! 그러면 너희 엄마, 아빠 위험한 거 아니야?"
"왜? 뭐가 위험해?"
"괴물이 잡아먹을 수도 있잖아!"
"아니! 그렇진 않은가 봐. 아빠 말로는 엄마, 아빠 결혼할 때 가지고 온 거래! 그래서 그런지 엄마, 아빠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야. 그리고 나도 아직 멀쩡한 걸 보면 사람을 잡아먹지는 않는가 봐."
"그러면 다행이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해!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어떡하긴, 녀석을 쫓아내야지!"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며 말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아니 어쩌면 녀석의 정체를 눈치챘을 때부터 녀석을 몰아내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마땅한 생각이 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유치원에서 돌아와 방으로 향할 때 화장실 안쪽에서 '웅웅'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녀석이 밥을 먹고 있는 것 같았다.
평소라면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녀석의 정체를 알고부터 부쩍 신경에 거슬려 화장실을 힐끗거리게 되었다.
녀석의 정체가 궁금해진 나는 화장실 문을 살짝 열어보기로 했다.
밥은 어떻게 먹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그리고 이번엔 어떤 양말을 먹는지가 궁금해서였다.
하지만 순간 무서운 생각이 들어 망설여졌다.
정체를 들킨 녀석이 나에게 달려들기라도 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얼마 전 아빠에게 선물 받은 슈퍼파워 장갑이 생각났다.
손마디에 다섯 빛깔의 장식이 달린 장갑인데 내가 그것을 끼고 있으면 아빠도 엄마도 꼼짝하지 못하는 금빛의 특수 장갑이었다.
나는 서둘러 내 방으로 들어가 그것을 끼고 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슈퍼파워 장갑만 있으면 두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화장실 문에 도착하니 긴장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아빠와 놀 때처럼 슈퍼파워 장갑의 힘을 믿기로 했다.
화장실 문을 열기 전 숨을 길게, 내쉬며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툭"
화장실 문을 열기 위해 손끝으로 '쿡' 하고 문을 밀었지만 한 번에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발끝으로 '콩' 하고 걷어차곤 서둘러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순간 겁도 났고 혹시라도 녀석이 뛰쳐나올까 봐 그랬다.
'괴물이 나의 정체를 알아차리기라도 하면 어쩌지? 다시 세탁기로 변해버리면 안 되는데.'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라 벽 뒤에 숨어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러자 화장실에서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위잉~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심장이 요동치며 나도 모르게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내가 온 걸 눈치챈 녀석이 부랴부랴 식사를 마치고 양칫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재훈아, 밥 먹자~" 주방에서 엄마가 나를 불렀다.
잔뜩 겁에 질린 나는 서둘러" 네~"하고 엄마가 계시는 주방으로 재빨리 뛰었다.
굳이 뛰지 않아도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혹시라도 녀석이 화장실에서 나와 나를 덮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세탁기 안 무서워?"
"무섭지! 그래서 돌고 있을 땐 절대로 손을 넣으면 안 돼."
"손을 넣으면 어떻게 되는데?"
"빨래에 손이 감겨 다칠 수도 있어. 아주 위험한 행동이야!"
엄마가 내 쪽을 빤히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감겨? 감기는 게 뭐야?"
평소 엄마가 쓰는 말이 아니라 생소해 물었다.
"어~ 그러니까…. 손이 부러질 수도 있을 만큼 위험한 거야."
잠시 생각하던 엄마가 무서운 표정으로 말했다.
'손이 부러진다면…. 녀석이 손을 잡아먹는다는 말이 아닐까?'
잠시 그런 생각과 함께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그렇게 위험한데 왜 같이 살아?"
엄마를 돌아보며 물었지만 엄마는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느라 나를 쳐다보지 않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빨래는 해야 하잖아!"
테이블 위로 마른 멸치를 내려놓으며 엄마가 말했다.
그 순간 엄마를 지켜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좋은 방법이 떠올랐지만 엄마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난 옷을 갈아입지 않기로 했다.
다음 날도 그리고 또 다음 날에도 같은 옷을 입었다.
"재훈아! 일어나. 어서 씻고 유치원 가야지."
엄마가 문을 열며 소리쳤다.
"응."
잠에서 깨어난 나는 어제 입었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재훈아! 옷 다른 걸로 갈아입어."
엄마가 나를 힐끗 쳐다보며 말씀하셨지만 난 엄마를 지켜야 했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뭐해! 옷 갈아입으라니까!"
아침밥을 차리던 엄마가 내 쪽으로 다가오시며 말씀하셨다.
"싫어! 오늘 이 옷 입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