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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fety Jay Sep 18. 2023

가족의 영국 유학기 #9: 영어야 놀자

두 살 아기와 도전한 영국유학

내가 대학원이 시작한 이후, 영국의 사회에 발을 내딛게 될 다음 선수는 2살 된 딸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아이에게 영어를 교육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노출로 아이가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을 목표로 해왔다. 굳이 학습했다고 한다면 생존 영어 단어정도뿐이었다. 


드디어 엄마 손을 잡고 첫 등원의 시간이 찾아왔다. 아내는 그런 딸을 위해 옷도 이쁘게 입히고, 머리도 이쁘게 묶어 주고, 그 누구보다도 귀여움이 터지는 한국인 아기 다운 모습으로 꾸며주었다. 나도 대학원 수업시간이 빈틈을 이용해 아이의 첫 등원을 응원하기 위해 잠시 들렀다. 


그렇게 우리 셋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널서리 앞에 멈쳐섰다.


소박한 영국 마을의 한복판에 있는 어린이집 앞에서, 우리의 작은 공주, 두 살짜리의 소녀가 눈부신 미소로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딛기 시작했다. 오후 1시인데도 마치 아침의 신선한 이슬이 함께 머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며 딸의 마음속에 심어 놓은 작고 귀여운 영국이란 씨앗이 빨리 푸르게 자라나게 될 것만 같았다. 그렇게 2살 딸은 엄마 손을 잡은 채로 서서히 새로운 세상 속으로 들어가며 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행히 아이는 집에 가고 싶다거나 엄마랑 있겠다고 울지 않고, 씩씩하게 엄마 손으로부터 널서리 선생님 손으로 옮겨 타며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다. 


영어라는 새로운 창문


하원할 때마다 널서리 선생님들은 우리가 걱정할 것을 알았는지, 특별히 아이가 무엇을 했고, 어떤 점을 잘했고, 무엇을 즐거워했는지,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내 기억으로 널서리를 다니기 시작한 지 6개월 정도에는 아이가 영어를 내뱉었다고 들은 것은 생존단어였던 "쉬", "물" 정도였다. 그리고 집에서도 특별히 아이가 영어로 우리에게 말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K엄마표 영어 도우미는 아이를 보채지도, 부담을 주지도 않고 즐겁게 언어와 익숙해질 수 있도록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한국에서 미리 구매해 온 DVD 플레이어와 CD들을 주섬주섬 꺼내놓기 시작했다. CD를 보니, 카이유(Caillou)와 페파피그(Peppa Pig)였다. 아내는 이 두 가지의 영어 만화를 딸에게 매일 조금씩 노출시켜 주기 시작했다. 내용을 보니 영국에서 딸이 겪는 세상과 최대한 비슷한 이야기를 통해 딸이 조금이라도 쉽게 영국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아내가 고심 끝에 선정한 영어 만화였다. 사실 나는 이 정도로 많은 고민을 하지 못했었는데, 딸을 위해 이렇게나 많은 준비를 해온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껶다.  


"카이유"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다가가는 데 있어서 딸의 가장 훌륭한 안내자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 에피소드는 어린이집을 다니는 연령대의 아이들이 겪는 세상을 너무나도 훌륭하게 다루고 있었다. 또한 집에서 사고 치고 엄마나 아빠한테 혼나는 에피소드,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함께 하는 하는 모래놀이, 친구들과의 갈등, 이빨 닦기는 싫어, 야채 먹기 싫어 등 지금 딸아이가 겪고 있는 삶과 너무 유사했다. 특히 카이유의 세계에서는 미묘한 감정 표현부터 복잡한 사회적 상호 작용에 이르기까지 어린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스토리가 그려졌다. 딸의 귀에는 자신의 상황과 비슷한 내용에서 듣게 되는 새로운 언어가 너무 재미있고 신나는 멜로디처럼 들리지 않았을까? 


"페파피그"는 영국을 배경으로 하여 가족애가 풍부한 이야기였다. 페파피그와 가족들의 영국 일상생활을 간접적으로 겪으며 딸이 영국 생활에 흥미를 가질 수 있었다. 일례로, 페파피그가 집에서 놀고 있는데, 밖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서 나가보니 우리나라에서는 오래전에 없어진 아이스크림 트럭이 동네에 왔었다. 페파피그는 뛰어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고, 이 장면을 본 딸은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던 중, 실제로 페파피그에 나온 아이스크림 트럭 음악소리가 우리 집 앞에서 들리기 시작했고, 딸은 아이스크림! 하고 소리 지르며 우리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근데 웬걸, 우리 집 앞에 진짜 아이스크림 트럭이 와있었고, 그 음악소리를 듣고 나온 동네 어린이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줄을 서서 각자의 아이스크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 딸도 페파피그처럼 줄을 스며 기다렸다가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는데, 어찌나 맛나게 먹었던지, 지금도 이것은 너무 즐거운 기억 중 하나다. 

 

이처럼 딸은 엄마의 정성스러운 배려 덕분에, 재미있는 영어만화를 통해 영국생활에 친숙해질 수 있었고, 이 두 캐릭터들의 세계에서 새로운 표현과 단어들, 그리고 문화적 상징들을 흡수할 수 있었다. 우리 딸은 언어의 신비와 즐거움을 발견하며, 영어라는 새로운 언어를 자신만의 놀이터처럼 즐기고 점점 친구가 되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딸에게는 영어라는 새로운 언어는 단순히 단어의 나열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창문이 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2살 딸의 영어는 매일매일 새로운 꽃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이중언어

딸이 낮에는 널서리에서 선생님과 친구들과 열심히 뛰어놀고, 저녁에는 카이유와 페파피그 영어 만화를 무한반복하면서, 어느덧 널서리를 다닌 지 6개월이 지났다. 사실 6개월 동안 아이가 몇 개의 영어 단어정도를 우리 앞에서 이야기하긴 했지만, 드라마틱하게 갑자기 영어회화를 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영어에 익숙해지고 흥미를 갖고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집에서 엄마아빠와 열심히 수다 떨며, 한국어만 일취월장했다. 그래도 우리는 아이가 널서리 생활을 즐거워하니 만족하고 아이에게 영어를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6개월을 기준으로 딸의 언어에 변화가 시작되었다. 혼자 거실에서 장난감 전화기를 들고 "헬로? 아임 #$##$@#@@. 빠이~" 이러고 있는 게 아닌가? 앞에 헬로와 마지막 굿바이는 분명 영어이긴 했는데, 중간에는 영어와 비슷한 외계어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근데 7개월, 8개월, 이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외계어 소리는 점점 영어소리로 모양이 정교해지고 있었다. 이런 변화를 지켜본 우리는 그저 너무 신기할 뿐이었다. 그동안 영어로 한마디도 안 하던 아이가 영어소리를 따라 하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두 개, 세 개 정도의 단어를 붙여서 문장을 구사하며 의사소통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널서리 선생님들도 이제 딸이 영어로 의사소통을 시작했다고 우리에게 알려왔으며, 집에서는 무조건 한국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만약 아이를 이중언어로 키우고 싶다면. 그렇지 않으면 아이는 한국어를 까먹게 될 거라는 기분 좋으면서 으슬으슬한 경고와 함께 말이다.


그리고 영국 생활을 한 지 1년이 지날 때쯤, 딸은 영어로 의사소통하는데 큰 불편함 없을 정도로 변해있었다. 널서리에서도 이제는 딸이 모든 생활을 영어로 하며 친구들과 잘 소통하고 있으니, 언어적 문제는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학부모 면담 당시에는 딸의 언어 발달 수준이 현지 영국 아이들과 똑같다며 굉장히 신기해했고, 우리에게 따로 영어 과외나 공부를 시키는지,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하고 있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아내는 따로 공부는 안 시키고 영어만화를 보여주고, 아이도 그것을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최근 들어 아내가 영어 단어카드를 가지고 아이와 함께 놀아주고 있다는 정도도 이야기해 주었다. 널서리 선생님들은 딸의 영어 습득 능력이 다른 외국 어린이들보다 빨라서 놀라움을 표현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도 우리는 가끔 아이가 구사하는 영어 표현에 놀란적이 꽤 있었다. 당연히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놀면서 배운 표현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알고 보니 카이유와 페파피그에서 나온 표현들이었다. 이때 나는 우리가 욕심을 내서 아이에게 영어에 대한 부담을 주기보다는 즐겁게 흥미를 갖고 편하게, 고통 없이 영어에 다가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을 목표로 준비해 온 아이 엄마의 판단이 굉장히 정확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와 와이프가 영어교육 전문가는 아니지만, 여하튼 아이의 생활과 밀접한 내용으로 구성된 만화를 통한 영어 노출이 아이가 가장 즐겁게 언어를 알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방식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영국생활 1년 반이 지난 지금, 딸은 아직 만 3살이지만, 영국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의사소통 능력이 성장했다. 놀이터에서 처음 만난 친구들과 대화하고 어울리고, 주말에는 옆집 할머니, 할아버지와도 즐겁게 놀면서 어려움 없이 생활하고 있다. 다만 여기서 신기한 것은, 이제는 집에서 혼자 영어로 중얼거리며 논다는 사실이다. 혼자 놀 때는 한국어보단 영어로 노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잘못하면 한국어를 안 쓰려고 할 수도 있겠다는 우려도 들지만, 어차피 우리는 한국에 돌아가서 살아야 하니 크게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가끔씩 딸은 잠꼬대조차 영어로 하기 시작한다. 1년 반이 지난 지금도 난 영어로 꿈을 꾸지 못하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딸이 부럽기도 하다. 아이들의 언어습득은 정말 신비하다. 


널서리에서 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인도네시아 등 다양한 국가의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 딸은 영어라는 새로운 언어 놀이터에서 뛰어놀며, 의미 있게 피어나는 꽃들처럼 소통이라는 봉오리를 피어냈다. 초반 영어로 대화조차 하지 않던 딸은 점점 영어라는 아름다운 언어와 친숙해지고 있었다. 어린이집에서 보내준 사진을 보면 딸은 친구들과 서클타임(동그랗게 앉아서 각자 집에서 있던 일화를 이야기하는 시간)에 손을 번쩍 들고 발표하는 모습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중 어린이집의 햇볕 밝은 창가에 앉아, 마치 선생님의 따뜻한 목소리가 나에게도 들릴 것만 같이, 그림책 속의 새로운 단어들과 이야기를 접하고 있는 딸의 모습이 내 가슴을 설레게 했다.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딸은 그 어떤 어른의 가르침보다 더욱 자유롭고 다양한 새로운 언어의 표현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만의 언어 놀이의 왕국을 창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딸의 가녀리고 작은 마음속에는 이제 영어라는 언어가 한 꽃밭처럼, 다채롭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꽃들은 딸의 미래를 더욱 다채롭게, 그리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길 바란다. 그 작은 어린이집에서, 아기는 언어라는 놀라운 선물을 품에 안고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물은 그녀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아내는 말했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서 혹시나, 아이가 영어를 까먹게 되더라도, 아이가 경험한 영국에서의 즐거운 기억, 설레는 경험들을 영원히 간직한 채 넓은 세상 속에서 자신감 있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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