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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대신비 May 14. 2024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만날 때

생은 비로소 시작된다

히브리어에는 바라bara라는 단어가 있다.

이는 창세기 1장에도 쓰였다.

‘창조하다’의 뜻이다.

 

바라의 원래 뜻은 ‘쳐내다’

‘군더더기를 칼로 잘라내다’이다.

 

그러므로 창조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유에서 특유로 넘어가는 것

특유에서 고유로 도약하는 것

 

우주도 완전한 무가 아니라

부피 없는 에너지 덩어리

무한 밀도의 가마솥

그 충만함에서 태어났다.

 

우리,

같은 곳에서 왔으니

애초 우리의 거리는 0이었으니


그때처럼, 그 최초의 순간처럼

너와 나 사이의 길 닦는 것이다.

그 연결 확인하는 것이다.

 

목수가 마지막 사포질 하는 것도

글쟁이가 탁마를 하는 것도

어느 결정적인 순간

인간이 자신 버리고 희생하는 것도


다 진정한 의미의 창조다.

 

그러므로 글은 쓰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잘라내고 쳐내는 것이다.

다 쳐내고 중심만 남기는 것이다.


삶의 군더더기 버리고

본질과 바로 만나는 일도


창조다.

 

우주의 시작이 그렇듯

우리도 군더더기 쳐내고 0이 되어야

비로소 태어날 수 있다.

 

이 우주에서 나와 나 사이만큼 먼 것도 없다.

먼 길 돌아 비로소 자신과 만났을 때

우리의 이야기 시작된다.

 

길가메시가 영생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자신의 맨얼굴*과 마주쳤을 때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와

아내와 아들 만났을 때


비로소 이야기는 끝난다.

아니 시작된다.

 

우리 생은 먼 길 돌아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과 만나는 이야기다.


지구 중심 통과하여

우주 한 바퀴 돌아오는 이야기다.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만나는

한 점이 있다.


고향에 돌아온 우리가 서로 만나는

접촉점이 있다.


그 지점에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다.

아기가 태어난다.

빅뱅이다.

 

 





*상호작용이란 매 순간의 빅뱅.


*맨얼굴 : 깨달음에의 비유로 써보았다. 영원한 생명 찾아 떠난 길가메시는 ‘영생을 얻은 자’ 우트나피쉬팀과 만나 불로초를 얻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국 영생도, 불로도 얻지 못했다.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그는 이후 현명한 왕이 되었다. 돌아온 길가메시가 쌓은 성벽은 어쩌면 문명을 상징하는 것, 야만에서 문명으로 점프한 길가메시에게 응원을 보내는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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