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윤제 05. 문학에 대한 짧은 생각
오늘의 시는 A+입니다
열여섯, 예고 진학을 희망하며 처음 시작한 나의 문학은 예고와 예술대학을 지나 문예창작 대학원까지 이어졌다. 내게 문학은 꿈인 동시에 평가의 대상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반에서 등수를 통해 내 시의 점수를 확인했고, 대학과 대학원에서는 학점을 통해 내 시의 점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길게 서두를 꺼낸 것은 일단 자랑 아닌 자랑을 하기 위해서인데, 나는 대체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예고를 졸업할 때는 소설, 시 전체를 통틀어 1등을 했고, 대학을 다닐 때엔 시 창작에서만큼은 단 한 번을 제외하고 모두 A+이라는 성적을 거두었다. 이 성적은 오랫동안 내 은근한 자부심이었다.
사실, 예고와 대학, 대학원에서 나는 실패를 거듭하는 학생이었다. 예고에서는 외부 공모전, 백일장에서 단 한 번도 1등을 차지한 적이 없다. 대학과 대학원을 거치며 무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등단을 하지 못했다.
그 모든 세월을 어림 잡는다면 3~400곳 이상의 대회에서 낙방을 했으리란 생각이 든다. 열등감과 열패감에 젖어있을 때, 나는 은근한 자부심을 꺼내어 마음을 닦곤 했다. 나 자신을 믿지 않으면 걸을 수 없는 길.
자신감엔 근거가 필요 없다지만, 때로는 믿음의 증거가 필요한 기나긴 밤이 있다. 그런 어둠 속에선 어쩔 도리가 없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 앞에서
나는 현재 한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치고 있다. 또한, 오랫동안 청소년들과 문학 입시 수업을 진행한 적도 있다.
지금은 나도 아이들에게 점수를 매긴다. 점수가 매겨지던 입장에서 점수를 매기는 입장으로의 변화는 생각보다 당혹스럽다.
문학엔 정답이 없다. 어떤 문학이 맞는지, 어떤 문학이 흥미롭지 않은지, 어떤 문학을 지양해야 하는지, 또는 지향해야 하는지는 모두 작가 개인의 몫이다. 게다가 문학의 좋음은 대체로 취향의 문제다.
강사로서 아이들 앞에서 시를 가르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현실적으로 입시를 생각해야 하고, 청소년기에 시를 배운다는 것의 의미도 고민해야 하며, 예술적 기교 이전에 예술가로서의 태도를 말해줘야 한다.
학교에서 난 무언가 정답을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거침없이 점수를 매긴다. 어떤 시에겐 A를 주고, 어떤 시에겐 D를 난도질한다. 마치 그 점수가 진리, 혹은 정답인 것인 양.
하지만 때로 도망가고 싶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정말이지 부담스럽다. 나의 스승들은 어떻게 이걸 견뎠는지 모르겠다. 고백하겠다. 내가 아는 유일한 사실은 '나는 모른다'이다. 미안하지만 그게 진실이다.
To be an artist is to believe in life(예술가가 되는 것은 삶을 믿는 것이다)
영국의 조각가 헨리 무어는 말했다. 예술가가 되는 것은 삶을 믿는 것이다.(To be an artist is to believe in life)
정답이 없는 문학 앞에서 나는 그저 믿을 수밖에 없다. 나 자신의 경험을, 나 자신의 공부를, 나의 예술관과 나의 신념과 내가 생각하는 문학에 대한 모든 것을.
내가 생각하기에 문학에 있어 유일한 정답이 있다면 이것이다.
<글쓰기에 대한 보상은 글을 쓴다는 사실 그 자체뿐이라는 것.>
타인에게서 매겨지는 점수, 수상이나 등수가 아니라, 글을 쓴다는 실감 그 자체가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보상이다. 나는 그 사실을 믿기로 했다.
사방에서 빗소리처럼 점수와 평가가 쏟아지는 세상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필요하다. 예술을, 문학을, 나아가 나의 삶을 믿고, 견지하는 일이.
당신의 문학은 몇 점입니까?
누군가 그렇게 묻는다면 나는 답하겠다. 100점이더라도, 0점이더라도 상관없다. 나는 내일 또다시 무언가 글을 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