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식 02. 노사연 언니의 사연은 노래입니다
눈 치울 일이 사라졌다. 빙판이 어는 일도 줄었고 얼마 전 길 가다가 자빠졌다. 빙판이 어는 일이 줄었다고 생각한 탓이다. 쑥스럽게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묻은 것도 없는데 터는 시늉을 했다. 천혜향을 까먹은 날 입춘이 지났고, 우리 어머니는 이맘때쯤에 자주 이 가수의 노래를 불렀다.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 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 사아라앙해. 너를 사랑해.”
노사연 언니는 1957년생으로 마산(현재 창원)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부터 절창이었던 그는 1978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돌고 돌아가는 길> 노래로 금상을 타고 화려하게 데뷔한다. 한 예능에서 그는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을 “대학가요제에서 금상을 받았을 때”라고 회고할 만큼 언니는 등장부터 주목을 끌었다. 특유의 매력적인 저음으로 시청자의 음감에 단비를 내렸지만 비주얼 체크를 무식하게(?) 일삼던 방송가에서 그는 트라우마를 겪는다.
가요 톱10 대상 탄 사연 언니의 촉촉한 눈망울을 볼 수 있다.
방송국에 초대받아 간 젊은 날의 사연 언니. ‘지금 굉장히 뜨는 애’라는 영광의 순간도 잠시, 방송국 무대에 올라 목소리를 가다듬던 찰나였다. 언니를 줌인한 방송 관계자가 느닷없이 “카메라 빼!” 냅다 악다구니를 했다고 한다. 오십을 넘긴 사연 언니가 세상 편한 목소리로 말한 에피소드이지만 청년 시절의 그로선 더더욱 치욕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방송국 놈에게 어퍼컷을 날리고 싶어진다. 그러고 보면, 사연 언니도 사연이 많구나.
혼자 말해서 미안해졌던 경험 있나요?
오늘의 주제는 노사연 언니가 아니다. 메롱. 속았지롱. 이 지면에서는 고유명사 노사연이 아닌 합성어로 노사연을 해석하고 노(No)+사연(Story)으로 읽는다(그렇고말고요. 사연 언니의 노래 사랑합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자기 이야기를 좀체 하지 않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대개는 세 가지인데, 아직 모종의 연유로 타인에게 말할 단계가 아니거나 말하기 쑥스럽거나 혼자서 생각하기 좋아하는 부류인 경우다(고백하건대 말하기 쑥스러워하는 사람에게 잘 반한다).
자기 PR이 필수처럼 느껴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종일관 상대를 설득하려는 목표를 가진 사람이 아닌 바에야 대개 뜬구름 잡는 말이라도 섞기 마련이다. 하지만 결단코 자신을 드러내는 말을 하는 법이 없는 사람을 간혹 만난다. 대개 귀퉁이에 앉아 있거나 주인공 옆자리에 앉는 사람.
‘노(No) 사연(Story)’으로 일관하며 그 흔한 노마드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는 사람. 흔한 동네 산책, 다녀온 여행지의 풍경, 오늘의 날씨 주제조차 꺼내지 않는 사람.
바이트 낭비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면 솔직히 그의 얼굴에서 일말의 목표가 읽히기 마련이다.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침묵을 일관되게 ‘리시브’하는 사람에게도 모종의 고집, 자만이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순진무구한 얼굴로 이야기를 방금 막 끝난 타인에게서 또 다른 타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시선을 돌리는 사람에게 왜 이렇게 마음이 쏠리는지 모르겠다. 말할 기회가 있음에도 “으음…” 하며 타인에게 기회를 돌리는 사람. 아무래도 나는 변태인가 보다.
만나고 돌아오면 혼자 이야기한 것 같아 쑥스럽게 하는 사람. 나를 미안하게 하는 사람. 열렬히 듣고 있음을 마음으로 눈치채게 해주지만 못내 자기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거나 그러지 않는 사람. 대신 “괜찮았어?”, “그랬구나.” 받아주는 언어만 쓰다가 눈가가 흐릿해지는 사람. 바보 같은 눈물의 문장을 보이지 않는 사람. 대신 리드미컬하게 숨소리를 내주는 사람.
착시효과일 수 있지만 그 말문의 단단함을 오독한 결과, 우리는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우정의 경우라면 상대를 외골수라고 놀리기도 한다. 혹시 모른다. 정말로 사연이 없을 수도 있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이야기로 남아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어떤 이야기는 국자 모양일 수도 밤하늘 초승달의 스위치 모양일 수도 있다.
훗날 그가 입문을 열었을 때 홍수처럼 터지는 바이트를 보기도 하지만, 자신의 말하기가 어떤 부정의 영향을 끼칠지 두려워하거나 초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면 종종 루마니아의 한 아재가 생각난다. 그 사람을 본 일이 없지만. 이 아재야말로 TMI의 대가가 아닐까.
“내 인생의 순간들을 생각해보면, 가장 흥분했던 순간이든, 가장 밍밍했던 순간이든, 그 순간들로부터 무엇이 남은 것일까? 그리고 지금과 그 순간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모든 순간들이 뚜렷한 형체도 없고, 현실성도 없이, 비슷비슷해져버렸기 때문에, 내가 진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은 내가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던 때이다. 즉, 내가 나의 경험들을 반추하고 있는 현재 상태 말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무엇인가 느꼈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기억이나 상상력이 되살려낼 수 있는 ‘엑스터시’는 이제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태어났음의 불편함』(에밀 시오랑) 중에서
엑스터시. 감정이 고조되어 자기 자신을 잊고 도취 상태가 되는 현상. 주말의 오후, 넥플릭스에 접속해서 어떤 콘텐츠를 시청할지 고르다가 이미지의 만화경에 빠져 내가 오늘 영상을 보려고 한 것인지, 오리백숙을 먹으려 한 것인지, 오리가 우주에 앉는 걸 보고 놀란 것인지, 어떤 선택을 하려고 한 것인지 까먹는 현상.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이미지가 횡횡하는 오늘 가운데서 가십거리를 나누는 법 없는 사람. 남의 말만 듣는 사람. 고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는 사람.
“쓸데없는 짓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현자의 특징이라면, 나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유용한 것들에게조차 몸을 낮추지 않기 때문이다.” -『태어났음의 불편함』(에밀 시오랑) 중에서
우리는 조금씩 일요일의 사람들
TMI보다 더 큰 의미의 대문자를 얻기 위해 아웅다웅 웅변하는 세상의 틈바구니에서 생각한다. 말로써 위신을 세우고 말로써 나의 능력을 관철시키고 유머감각을 뽐내는 대부분의 사람은 평일에 취해서 산다. 수요일의 새벽, 그를 떠올려본다. 외골수 혹은 말문을 통 열지 않는 덤덤한 옥수수 같은 사람. 달콤한 냄새가 나는 사람. 파티룸의 끄트머리에서 눈앞에 펼쳐진 오늘의 광경을 쑥스럽게 지켜보는 사람. 망부석 같은 어깨와 희미한 눈망울. 그는 주말의 사람이 아닐까.
우리는 주말에 말을 고르지 않는다. 방귀를 뀌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거나 치킨을 시킨 채 잠옷 차림으로 주말의 명화를 본다. 랩을 연습하거나 조카와 그림을 그리거나 내리 숙면을 취하는 현자들도 있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주말에 나누는 대화들은 자신의 존재를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는 말들의 집합이다. 그런 요일들이 우리가 안식할 수 있다는 증거를 옥수수알처럼 고소하게 모아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일요일의 사람이자, 모두 한번쯤 한 달을 풀(Full)로 일요일의 사람으로 살고 싶어서 표현하지 않는 그를 수상한 눈초리로 보고 있을 수도 있겠다. 주위에 통 자신의 사연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밉지 않다면 그가 내심 당신의 말을 계속 들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 그가 말하지 않음에 요상한 눈초리를 하는 자가 있다면 슬며시 곁에 가서 말해 주자.
시작은 산뜻하게. “일요일 좋아해?” 그리고 더 요상한 눈빛을 당신에게 보낸다면 한마디를 덧붙이자. 자신을 증명하기 좋아하는 웅변의 달인일지도 모르는 현자에게 미간에 십일자를 작게 만들고 “노사연, 노터치, 노 프라블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