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전선이 오락가락하던 홍천 공작산을 선택한 건 충청 이남 지역으로 비가 집중된다는 일기예보 때문이었다. 원주에서 출발해서 횡성을 거쳐 홍천 공작현 주차장에 도착하니 11시 30분. 잔뜩 흐린 날씨에 한바탕 비가 쏟아질지도 몰라 불안했다. 마침 등산로 입구 관리소에 근무하는 분이 있어 조언을 구했다.
"비 온다는 예보는 없어요.
"정상까지 갔다 오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평소 등산 많이 하세요?"
"한 달에 두어 번 정도요."
"빠르면 두 시간 삼십 분 정도, 넉넉 잡아도 세 시간 삼십 분 정도면 됩니다."
"힘든 구간은 얼마나 될까요?"
"깔딱고개가 서너 번 정도 있습니다."
왕복 시간이나 난이도를 생각하면 비가 오지 않는다면 정상 찍고 오는 데 큰 문제 없을 거 같았다. 먼저 올라갔다 하산하는 분들을 보니 올라가겠다는 욕구가 더 생겼다. 두 세 시간 정도 코스라 스틱도 챙기지 않고 배낭만 메고 들머리로 들어섰다. 30분 정도 올라가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약했다. 폭우가 되어 내리면 발길을 돌려아지 생각하며 계속 올라갔다. 약하게 내리던 비는 잠시 뒤 잦아들고 뿌연 안개가 사방을 뒤덮었다. 밧줄 타고 오르고 내리는 깔딱고개와 암릉 구간이 곳곳에 있어 긴장을 늦출 수 없었지만 한 시간 만에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 먼저 올라와 앉아 있던 등산객이 말을 걸며 반겨주었다.
홍천 공작산 정성, 공작현 주차장에서 한 시간 정도 걸렸다.
"어디서 올라오셨어요?"
"공작현 주차장에서 왔습니다."
"아, 저도 공작현에서 출발했어요."
"비 올까, 걱정했는데 약간 오다 말아 다행입니다."
"올라오다 저도 조금 맞았어요."
번갈아 정상석 옆에 서서 인증샷을 찍어주고 각자 배낭에 챙겨 온 김밥과 빵을 나누어 먹으며 이야기했다. 퇴직 후 본격적으로 등산을 시작해서 2년 정도 되었는데 100대 명산 절반 정도 오를 정도로 산에 빠져 살았다고 했다. 친구들과 같이 올 때도 있는데 등산 후 술을 너무 많이 먹게 되어 최근에는 혼자 오는 편이라고 했다. 나도 위암 투병 후 산을 찾게 된 사연, 완치 판정을 받기까지 등산이 큰 도움이 된 거 같다고 이야기했다. 안개 자욱한 곰탕 날씨에 공작산 정상에서 대화하며 바라본 전망은 온통 회색이었다.
정상에 오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저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네, 조심해서 내려가세요."
한발 앞서 내려오다 길을 잘못 들었다. 안개 자욱한 하산 길에 밧줄과 가파른 암벽이 군데군데 있어 온 신경 곤두세우다보니 수타사 삼거리 갈림길 이정표를 보지 못한 채 공작현 주차장 반대쪽으로 내려갔다. 30분 정도 내려가다 처음으로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암릉 구간을 다 내려갔는데 밧줄 끝부분이 바위나 나무에 고정되지 않고 풀려 있었다. 올라갈 때는 못 보았던 모습이라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길을 잘못 들었을 거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20여분 더 내려가다 발아래 펼쳐진 암릉 구간을 보고서야 이 길이 아니라는 확신이 생겼다. 수직에 가까운 암릉 구간 바위 절벽에 밧줄과 함께 발로 딛고 올라갈 수 있는 발판이 군데군데 박혀있었는데,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구간이었다.
수타사 삼거리 이정표, 이곳에서 공작현 쪽이 아닌 수타사 방면으로 길을 잘못 들어섰다.
공작산이 처음이라 잘못 들어선 길이 어느 방향인지 알 수도 없었고 공작현 주차장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되는지도 몰랐다. 잘못 들어선 게 확실하니 내려오던 길 되돌아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내려오던 길을 되짚어 올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기가 막혔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도 없는 일이다. 가쁜 숨 몰아쉬며 급경사를 오르고 밧줄 잡고 암벽을 오르고 또 올라가도 갈림길 이정표가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 정상까지 올라가야 하는 건 아닌지 불안해졌다. 잘못 든 길이지만 등산로 따라 내려가다 보면 이정표는 나올 거고, 거기서 제대로 방향 잡아 공작현 주차장으로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하고 지친 상태였기에 쉽게 갈 수 있는 내리막길이 좋았다. 밧줄과 발판이 있는 바위 절벽을 지나 한참을 내려가니 이정표가 있었다. 하지만 이정표에는 수타사와 군업리 방향만 표시되어 있었고 공작현 주차장은 아예 없었다. 수타사까지 남은 거리 6㎞, 오던 길로 돌아서 공작산 정상까지 가는 길 0.73㎞.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시 정상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곳곳에서 이어지던 암릉 구간
이러다 조난되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산속에서 조난되는 사람 중에는 같은 코스를 뱅뱅 돌다가 기진맥진 주저앉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세 번째 공작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내 모습이 그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이 밀려왔다. 산길샘 앱이라도 설치하고 왔어야 하는 건데 …. 밧줄에 매달리고 암릉 구간을 기어오르면서 미끄러지고 주저앉기를 되풀이하면서 오르고 또 올랐다. 저 구간만 오르면 정상이기를 바라던 마음이 수차 좌절이 되어 다가왔다. 또 다른 구간이 거대한 장벽이 되어 막아섰다. 아으 다롱 디리 …. 가져간 물도 바닥나고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정상까지는 올라갈 수 있을까? 정상까지 가면 공작현 내려가는 이정표를 발견할 수는 있을까?
희망은 예고 없이 불쑥 다가왔다. 기다시피 암릉 구간 넘어 올라가던 눈앞에 이정표가 우뚝 서 있었다. 반색해서 올라가 보니 공작현 주차장 방향이 보였다. 공작산 정상 120m 전, 공작현 주차장까지 2.46km 거리였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지친 몸으로 2.46㎞ 내려오는 것도 힘이 들었다. 다리가 풀려 수차 미끄러지고 넘어졌다. 공작현 주차장 도착하니 오후 4시 30분, 꼬박 다섯 시간 걸렸다.
알바도 산행의 일부
공작산의 경험담을 듣고 지인들은 천만다행이라며 위로해주었다. "동네 산도 우습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등산 선배의 말에 뜨끔했다. 왕복 세 시간 정도의 산행이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올라갔기 때문이다. 이름난 명산보다는 인적이 드문 야산을 더 자주 찾는 산객 친구도 한마디 했다.
"수타사 삼거리에서 무심결에 오른쪽 수타사 방향으로 내려갔구먼. 길은 그쪽이 더 잘 보이니 그럴 수도 있지. 고생했네. 이리 무사 귀환해서 잘 되었네. 알바도 그저 산행의 일부라 여겨야지 뭐."
인적 드문 야산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친구다운 말이었다. 잘못 든 길에서 겪었던 경험도 약이 될 수 있고, 힘겹게 주저앉아 바라본 눈앞에 생각지도 못했던 절경이 펼쳐질 수도 있다. 잘못들어 가는 길도 길이고, 알바도 산행의 일부라는 걸 친구가 깨우쳐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