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미 Sep 28. 2024

괜찮다, 괜찮아!

사는 이야기

2022년 6월 13일,


- 매일의 새벽 감사하며 -


식구들이 일어나기 전, 내 강아지 뭉과 나만 깨어있는 고요의 시간, 일찌감치 도착해 창 밖에 서성이는 새의 노래를 안으로 들이고, 우유커피를 타서 바나나 하나를 까 뭉과 나누어 먹는다. 나는 많이 뭉은 조금.ㅎ



그 다음에는 일기장을 편다. 2년 전부터는 새벽에 일어나 일기를 쓴다. 어둠을 동그랗게 지우고 앉아 늦은 밤에 끄적거리는 일기는 우울한 마음을 키우고 깊은 슬픔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밤을 아침으로 바꾸니 자기비하는 성찰로, 비관은 다짐으로 천천히 옮아 갔다.

가끔은 그림일기도 쓴다. 그림은 글과 다른 정화의 느낌이 있어서 좋다. 대단한 작품이다.ㅎ

그림일기



일기가  없는 날은 이웃들이 올린 블로그의 글을 읽으러 간다. 그리고 정성껏 댓글을 단다. 짧막한 문장으로 알은체 하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나 싶었는데, 곱고 재미지고, 힘을 북돋우는 언어를 골라 정성을 다해 쓰다보니 내 맘이 따뜻해졌다. 오랜 세월 험한 말과 저주의 말, 통한의 말들로 쌓은 구업을 씻어내는 경건한 시간이 됐다.

원래는 작은조카를 등교 시키기 전에 잠깐 비는 이 시간에 어떻게든 책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오후 두세 시가 되면 몸의 힘이 다 되는 저질 체력이라 살기 위해 필요한 일을 대충 하고 나면 눕기 바쁘다. 대단한 석학도 아니면서 책 들여다볼 시간이 없어 늘 불안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작은녀석이 학교에 가고 나면 베란다의 식물들을 살피러 나간다. 나의 채마밭이다. 나름 무럭무럭 크고 있는 방울 토마토. 화방이 두, 세 번째까지는 달렸는데 흙이 적어 그런지 그 이상은 잘 자라지 않는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내게는 천지가 개벽하는 것만큼이나 새롭고 흥미진진하다. 열매도 제법 달렸다.

잘 자라고 있는 방울 토마토



상추도 너풀너풀 여전히 잘 큰다. 꽃과 잎을 보기 위해 키우는 다른 식물들과 달리 병충해 없이 건강하게 자라니 마음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어서 좋다. 키우는 강아지가 아프거나  식물들이 시름시름할 때는 참으로 막막하고 답답하다.

이번 주 아침에는 상추를 두 차례 수확했다. 햇빛이 강해져서 그런지 두 번째 뜯은 것은 쌉싸름한 맛이 났다. 자기는 상추라고 내게 온몸으로 말했다.

베란다에서 크고 있는 적상추



아침 나절에 마쳐야 할 일이 하나 늘었다. 여름에는 땅이 달궈지기 전에 산책을 나간다. 털복숭이  내 강아지들도 덥지만 내게도 더위는 쥐약이다. 몇 년전부터는 몸에 열이 오르면 벌겋게 발진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렇게 늙어갈 줄은 몰랐다.

내 강아지들



- 친구와 깨달음에 감사하며 -


토요일에는 친구를 만났다. 내게 늘 살 길을 열여주는 지혜의 원천이며, 내 영혼의 짝꿍이다.

생의 위기를 맞은 큰조카를 온전히 껴안을 수 없어 몇 주간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난데없이 사납고 거친 말을 쏟아내는 모습을 보며 그간 쌓였던 것이 봉인을 뜯고 세상 밖으로 나왔구나 이해하면서도 감당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친구와의 긴 이야기의 끝에서 아이와 나의 마음 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 마음들이 너무나 처연해 눈물이 났다.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도 미숙하고 어리석어 그것을 아이에게 온전히 주지 못했다. 부메랑으로 돌아온 아이의 격한 몸부림에 내가 해체되는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어느 날에는 그 사랑을 망각해버렸다. 나는 그렇게 자기부정의 오류에 빠져 가라앉고 있었다. 나의 한계를 직면하고 거기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리라. 오류와 거짓은 다른 거니까.


나목처럼 앙상해져 그녀를 찾아갔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마음 속에는 다시 작은 움들이 자라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바싹 마른 땅에 뿌리를 내리고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로 연명을 하는 나무들. 지금은 무거운 물주머니를 목에 건 채 간신히 목만 축이고 있지만 나무야 버텨보자. 너한테도 나한테도 그 짐을 내려놓을 날이 오겠지.

목에 물주머니를 건 채 가뭄을 견디는 가로수



집에 오니 큰애는 학교 기숙사로 돌아가고 없다. 뭐라도 먹여 보내고 싶었는데…….


무릇 삶에는 '이것만 끝나면', '이번만 넘어가면'은 없나보다. 크고 작은 파도들이 잊지 않고 나를 찾아주니 외로울 틈이 없다. 그래도, 시간의 먼 바다, 그 심연 어디쯤에서 쉼없이 일어서는 거친 물살이 태양 아래 잔잔히 눕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만하면 이번 주도 잘 살았다.




2024년 9월 28일 토요일

절망의 아침에 희망의 일기를 읽었다. 눈 앞에서 벌어지는 작금의 상황이 이전보다 더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견디는 힘이 점점 약해지는 것은 맞다. 계절을 걸러, 달을 걸러 널을 뛰던 마음이 이제는 시간 단위로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자맥질한다. 물 위로 머리를 들어 푸른 하늘이 보는 동안에는 물속을 잊고 어둠 속에 숨이 막힐 때는 양떼구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2년 전의 그 아침과 오늘은 무엇이 다를까? 감사의 마음이 없네. 새벽 일기를 쓰며 자기비하를 성찰로 바꾸었다고 여겼지만 성찰로 깊어진 자의식 속에서 새로운 절망을 만났다. 내 안의 엄마를 죽여야 내가 사는데, 덮어 두었던 세월이 너무 오래라 엉켜붙은 그녀와 나를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비관에서 태어난 다짐 역시 더욱 깊어진 비관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도무지 감사의 마음이 일지 않아 다행의 기도로 버전을 바꿔봤지만 기도발이 신통 않다. 아물지 않는 상처를 후벼파며 여전히 피 흘리는 인연의 옹이들을 더듬어 내려간 그곳에는 도 내 탓도 할 수 없는 불행의 강이 유유히 흐를 뿐이다. 이 놈의 인생, 참 살아내기 힘들다.

그나저나 오늘은 토요일,

뭐를 해먹어야 하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