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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램즈이어 May 31. 2024

시칠리의 작은 와이너리

메시나, 시칠리아 풀리아 여행기

 시칠리 섬에서의 마지막 날 메시나 부근의 Tenuta Enza La Fauci라는 와이너리를 방문했다. 그곳은 바다를 끼고 산기슭 언덕 위에 있어서 대형버스로 근처에서 내려 거기서부터는 작은 차로 샛길을 올라가야 한다. 와이너리 측에서 두 대의 자동차로 총 24명인 우리를 4명씩 여러 번 실어 날랐다. 사람을 가득 싣고 야생화가 핀 구불구불한 길을 올라가느라 차는 힘들었는데 그 털털한 차를 운전하는 꽃 미남 청년 1, 2 때문에 우리는 기분이 좋았다.

 고불고불한 산길에서 내려 농장 입구에 다다랐을 때 모두들 바다가 보이는 전망에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입구에는 장식용 오크통 두 개가 방문객을 맞이하며 목조 건물 테라스로 이어진다. 일행 중 한 명은 전날 일정의 타오르미나 벼랑에서보다 더 풍경이 낫다고 한다.

 와인을 잘 모르고 유럽 와이너리 방문도 겨우 두 번째지만 이곳은 규모가 작아 보였다. 서열이 가장 높은 듯한 청년 1 이 포도밭에서 개괄적인 설명을 해 주었다. 키가 작은 이 녀석들은 20년생이다. 시칠리의 어떠어떠한 품종과 교배가 이루어졌다. 해풍(海風)으로부터 포도나무 잎들이 어린 포도송이를 어떻게 가려주는지 등등. 여기를 잠깐 방문하는 사람도 햇볕과 바람과 바다 풍경에 반해 어쩔 줄 모르니 이런 천혜의 자연에서 자라는 녀석들은 보나 마나 최상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청년 1, 2는 이곳에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는 듯하다. 점심식사 때가 되자 이번에는 보통 미남 청년 3과 함께 음식 서빙을 시작했다. 시음을 위해 적, 백포도주와 로제 와인이 나왔는데 그중에서 모두들 백포도주를 칭찬했다. 저렴하게 판매도 하므로 이곳에서의 추억을 기릴 겸 23유로(35000원)에 한 병을 샀다. 전반적으로 음식도 괜찮았는데 특히 모차렐라 부라타 치즈가 맛있었다. 그러고 보니 시칠리아에서는 흰 찐빵 모양의 이 치즈를 늘 맛나게 먹은 것 같다.

 디저트를 먹을 때쯤 산들바람이 경쾌하게 불어온다 했더니 갑자기 쨍그렁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입해서 내 의자 옆에 잘 두었던 백포도주 병이 사뿐하게 넘어지며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당황하고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청년 3이 잽싸게 다가와 안심시키며 유리 조각을 줍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는 파편들을 모으는 중간중간 바닥에 흥건한 액체에 손을 담갔다가 그것을 목과 팔에 열심히 바르는 것 아닌가? 의아해하고 있는데 가이드가 포도주는 새로 준비해 줄 것이라는 말과 함께 이탈리아 풍습을 알려 주었다.

 포도주를 마시는 식사 중에 병이나 잔이 깨졌을 때 그 일은 그 방 모든 사람에게 행운을 가져오고, 특히 깨진 병에서 흘러 난 포도주를 몸에 바르면 복을 더 많이 받는단다. 포도주를 기울이며 잦은 연회를 하는 민족답게 유쾌한 미신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흥겹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할 수 있고, 병을 깨트린 당사자가 당혹스럽지 않을 수 있겠다.

 식후에는 테라스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따사로운 햇볕을 넘나들며 담소를 나누었다. 야자수와 선인장 너머로 멀리 해안선이 보이는 것은 마치 남국의 어떤 리조트 풍경 같다. 함께 설명 들었던 미국인 가족이 기다란 벤치에 기대어 일광욕 포즈까지 취하고 있으니.

 돌아가는 길에는 청년 2가 운전하는 차를 탔다. 그런데 올 때와 반대 방향인 내리막길에서는 푸른 바다가 무척 가까워서, 코앞에 펼쳐진 푸르름에 깜짝 놀랐다. 파랑이 좋아서 앙리 마티스, 이브 클랑, 김환기의 파랑에 대해 시를 쓴 적이 있다. 최근에는 브런치 호랑 작가님의 푸른 스케치에도 반했었다.

 그날 마주친 예술가는?

 직사각형 네모에 모든 종류의 파랑을 담고 있다. 파랑의 세계가 얼마나 다양하고 찬란한지 보여주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것 같다. 검푸름에서 시작해서 코발트에 이어 하늘색까지 촘촘히 색의 점층적 변화(gradation)를 보여 주며…. 맑고 맑은 푸르름밝은 태양빛을 이고 벅차게 가슴으로 밀려온다. 문득 흰 돛단배도 한 척 등장하니, 심심할까 봐 포인트도 그려 넣는 이 거장의 센스!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는 참 아름답구나!" 괴테처럼 외치면서 그저 가득 눈과 마음에 담았다.

 남 프랑스의 코트다쥐르 지방에서는 지중해의 바다색에 좀 실망했었다. 그들이 아주르 아주르 (azure, azure) 하는 것에 비해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의 파랑이라면 자부심을 가질만하다.

 우리만 바다에 넋이 빠져있으려니 했다. 늘 바라보는 이곳 사람들은 좀 무감각하겠지 하고 있는데, 갑자기 청년이 서투른 영어로 말했다. 자랑스러운 듯 “이오니아 해(海) 아름답지요?” 하고.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곧 큰길에 도착하고 아쉬움으로 내릴 채비를 할 때 망설이다가 청년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이 바다 티레니아 해(海) 아닌가요?”

 순간 청년의 표정에서 놀라움과 반가움이 스쳤다.

 “네 맞아요. 이 바다는 티레니아 해(海)입니다.” 그러면서 뭐라 뭐라 다른 이야기도 덧붙인다.

 그 전날 룸메이트 후배에게 메시나는 시칠리 섬 북쪽에 있어서 바라보는 바다가 이오니아 아닌 티레니아 해(海)인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청년은 우리가 외국인이라 모두에게 잘 알려진 이오니아 해(海)로 대강 퉁치려 한 것 같다. 먼 곳에서 온 동양인이 정확하게 티레니아 해(海)로 알고 있어서 놀랐을 것이다. 우리는 늘 공부에 진심인걸 모르고.          

 



** photo by Lambsear and her colleag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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