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콩돌이 아빠 Aug 17. 2023

'괜찮아요'라고 할 수밖에 없어서 괜찮지 않아요.

<너는 너만 생각해> 시리즈

<I am not Okay> 종이에 과슈와 수성마커펜, 23 x 16 cm, 2023

'욱!'


 가슴에 피가 쏠리며 목구멍까지 압력이 전해진다. 나는 천방지축으로 태어났는데 무시무시한 가정교육과 본의 아니게 겪은 인간관계의 어려움 덕에 본심을 누르고 때에 맞추어 문제 되지 않을 말을 잘 이어나간다. 그러다 일순간 망나니 같은 천성이 그간 쌓은 매너 등을 뚫고 나온다.


  '욱'할 때의 그 피쏠림과 객기를 더해 이따금 좌중을 통쾌하게 만든 일갈을 내뱉은 적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 떨리고 울먹이는 목소리에 내 입장을 에두르기 일쑤였다. 그리고 잘 이어온 관계가 무척 어색해지거나 진행되던 일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나서야 '아차!' 하며 내 행실을 복기하기 시작한다.


 20대 후반, 억지와 무리를 최대한으로 활용해 영어를 배웠고 미국생활을 해나갔다. 한국에서 유명한 미국 드라마 따위에서 거침없이 내뱉는 자기표현, 길거리에서 서슴없이 이뤄지는 애정표현들을 보면서 꽁꽁 감춰두었던 내 본성이 잘 먹힐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막상 가서 살아보니 하하 호호 전 세계 다인종이 모여서 서로 어깨동무를 할 것 같던 현지생활은 그렇지 않았고, 다들 어떻게든 서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긍정과 격려, 또는 대책 없는 청사진만 무수히 늘어놓다가 헤어지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 사람들 속에서 머릿속에 번뜩이며 나타나는 단어를 가감 없이 뱉어내는 한국 총각은 처음에는 유쾌하고 즐거운 인간으로 보이다가 슬슬 무례하고 철부지 같았기에 외면받기 시작했다.


 매 순간, 몸을 담는 곳마다 시행착오가 반복되며 손 끝에 촉감까지 느껴지던 꿈같은 기회들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고 나는 말조심하는 법을 스스로 강요했다. 어쩌면 고성을 치던 아버지와 애절하게 당부하던 엄마의 것 이상으로 스스로를 옭아매기 시작했고, 미묘한 정적이나 순간 보일 듯 말 듯 굳어지는 상대의 표정에 가슴이 철렁한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다 괜찮습니다.' 등의 전혀 괜찮지 않은 표현밖에는 남지 않았다.


 어느 한 오후, 꾹꾹 참고 괜찮은 척했던 속이 폭발할 것 같았다. 모두가 떠난 빈집에서 실내화를 집어던지고 온갖 욕을 내뱉고 있는데, 평소에 다정히 팔을 내어주며 붕가붕가를 허락하던 형아가 몹시 화가 난 모습에 럭키가 덜덜 떨며 저만치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너무 미안했고, 던지기 직전의 슬리퍼를 한 손에 머쓱하게 잡고 얼음처럼 멈춰있다가 곧 조용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는 괜찮아요'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진짜 괜찮지 않다. 그래도 한 번 물어봐줬으면 좋겠다. 아니면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주면 가슴에 응어리가 조금은 풀린다.

작가의 이전글 말속의 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