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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돌이 아빠 Sep 21. 2023

진짜 하기 싫다.

<겉밝속축>시리즈

<진짜 일어나야지> 종이에 과슈, 23 x 16 cm, 2023

 고등학생 시절 한창 유행하던 양영순 화백의 <누들누드>라는 만화시리즈가 있었다. 적당히 성적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과 그림에 혈기왕성하던 나는 출판된 책도 한 권 샀다. 문득 그 만화가 떠오르는 요즘, 유독 한 에피소드가 생생히 기억난다.


"진짜, 내가 이번 전시만 끝나면 이거 다시는 안 해. 정말이야."

"... 그냥 말을 하지 마. 그냥 해, 하고 싶어 하는 거 다 알아."


 전에도 달고 살던 말이긴 하지만 올해 들어 그 빈도가 잦아진다. 그만큼 나도 많이 지쳤고, 전에는 막연한 희망 같은 게 보였는데 어느덧 40이 가까워지고 이맘때면 성취해야 했던 스테이지들이 차곡차곡 산적해가기만 하자 그 무게에 눌려서 옴짝달싹 못하게 되는 느낌이다. 한창때 유도 시합을 하면 조르기를 당할 때가 있었는데, 도저히 견디지 못하면 그대로 기절하거나 상대의 몸을 손으로 두드리며 기권의사를 표한다. 요즈음 작업을 하는 느낌이 딱 숨이 꼴깍하고 넘아가기 직전의 그 순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양영순 화백이 일필휘지로 그려낸 만화에는 몸에 총상을 입고 쓰러질 듯 피를 흘리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는 곧 숨이 넘어갈 듯한 표정을 지으며 가까스로 본인이 맡은 바를 치러나간다. 총상에 피를 흘리며 미션을 해결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손자를 보고, 그리고 천수를 누리다가 죽는다. 곧 죽을 것 같던 그는 결국 할 일, 하고픈 일을 모조리하고 하직을 했는데, 꼭 그 씁쓸하고 엉뚱한 모습이 '이번을 마지막으로 작업을 그만하겠다'는 내 징징거림과 닮은 것 같다.


 전에는 전시가 하나 잡히면 죽을 듯 달려들어 온몸을 하얗게 불태웠다. 소득이 없어도, 비아냥이나 냉대에 상처를 받아도 그저 좋았다. 뭔가 그 하얀 벽과 따로 시간을 내어 찾은 사람들이 내가 만든 허술한 것에 발걸음을 멈추고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 모습에 가슴이 벅찼다. 그렇게 몇 주, 몇 달, 몇 년을 보내다 보니 이제 바라는 것들이 생긴다.


 그나마 염가에 얻은 작업실 철문을 열면 지긋지긋한 환풍기 소음이 온몸을 찔러댄다. 퀴퀴한 공기에 한여름에도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 하는 이곳은 내 인격의 바닥을 대면하는 장소인 것 같다. 한 4-5시간이 지나면 늘 찾아오는 마귀가 나에게 또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이게... 좋냐? ㅋ"

"이거 하면, 돈이 생기냐? ㅎ"

"너 때문에 가족들이 힘든 것 같지 않냐? ㅉ"

"이런 거, 벌써 다른 사람들이 몇십 년 전에 다 한 거 아니냐?"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불신과 부정을 손톱으로 긁어 떨어뜨리는 방법은 그냥 지금 딱 5분만 집중해서 할 일을 해내는 것이다. 그래도 양심이나 정서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서 피가 흘러내리는 느낌이다.


"딱 이번 것만, 딱 이 전시만 잘 치를 거야. 그러니 부디 조용히 해주길. 다음 작업에 다시 찾아와 주길 바란다."


 나도 내가 재능 없는 걸 잘 안다. 그래도 몸치의 창피를 무릅쓴 진심 어린 댄스는 비웃음이 터지는 구간이 지나면 슬슬 사람들의 박수를 이끌어 낸다. 오늘도 진짜 하기 싫었지만 그냥 할 수 있는 만큼 조금 해냈다. 내일도 잘 버텨낼 수 있기를...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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