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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돌이 아빠 Sep 27. 2023

비 왔던 날

<겉밝속축>시리즈

<비 왔던 날> 종이에 색연필과 수채, 23 x 16 cm, 2023

 비가 내렸다. 우산을 잘 잃어버리고 옷이 젖는 게  꿉꿉한 나는 비 오는 날이 참 싫다. 그래도 날이 많이 시원해져서 기분이 좋은데 비가 바람과 함께 공기를 차갑게 만드는 것 같아 오늘은 반갑다.


 어제는 이야기하면 참 즐거운 친구를 만나 바쁜 그의 시간을 뺏으며 그간 차곡차곡 개어놓은 생각들을 쏟아냈고, 집에 돌아와 너무 피곤해 쓰러져 잠들었다. '작업해야 하는데', '전시 얼마 안 남았는데'라는 말이 겨드랑이를 간지럽히고 등을 떠밀지만 축 처진 몸이 훨씬 묵직해서인지 여간해서는 자리를 안 뜬다. 다시 축축하고 컴컴하고 씨끄럽고 먼지가 흩날리는, 그리고 이에 더해 짐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작업할 공간이 거의 없어진 창고 겸 작업실로 가는 길이 너무 멀게 느껴진다. 이럴 때는 차라리 작업실이 정말 멀어서 가기 어려우면 좋은 핑곗거리가 될 것 같은데 아무리 천천히 가도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지하실은 책임소재를 온전히 내쪽으로 떠민다.


 가끔은 할 말을 온전히 들어줄 상대 찾는 것이 불가능해져서 (콩돌이 엄마도 도망치거나 딱 잘라서 안 듣고 싶다 할 때가 있다.) 하루에 쓰고 싶은 글이 감당 가능한 집중력과 체력보다 많은 날도 있는데, 주말과 지난 며칠간 '하고픈 말'보다 '해야 할 말'이 더 많았기 때문인지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버리거나 파기할지라도 일정양을 쓰면 좋겠지만 나는 그림도 그려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하고, 콩돌이랑 농담도 해야 하고, 낙서도 끄적여야 하고, 할게 많다. 그러다 보니 우선순위에서 밀린 글쓰기가 하염없이 잊히고 외면될 때가 있다.


 내가 쓴 글을 누가 읽어나 줄까? 글을 썼으니까 빨리 읽어보라고, 그리고 재밌지 않냐고 옆구리를 사정없이 찔러대는 아내 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 같아서 한강변 돌바닥에 혼자 앉아 철 지난 유행가를 부르는 느낌이다. 그림을 그리고 입체를 만들 때도 비슷하다. '과연 누가 볼까'. '괜한 조롱거리나 되지 않을까', '분명히 다시 포장해서 돌아와야 하는데' 하는 걱정에 하고픈 맘이 어질러지면 아까운 시간이 시냇물처럼 쫄쫄 흘러가 버린다.


 사정없이 스스로를 자책하고 비관적인 상상으로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날, '도대체 어떻게 저 일을 해내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게하는 사람들에게 격려를 받는다. 아내가 그랬고, 친구가 그랬다. 그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시원하고 작업을 하지않아도 될 이유가 되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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