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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돌이 아빠 Oct 25. 2023

인연

<겉밝속축> 시리즈

<그냥 해> 종이에 색연필과 테이프, 23 x 16 cm, 2023

 꼬깃한 체크무늬 셔츠, 혼자 대충 밀어 올린 밤송이 같은 머리에 한 손에는 간신히 산 롤케이크를 하나 들고 어두운 듯 미소진 얼굴로 서있었다. 장난이나 도움이 될 진심이라는 명분에 남들로부터 들어온 '네까짓게 예술은 무슨'이나 '이런 건 안돼'와 같은 저주가 설탕물처럼 찐득하게 내 몸을 덮고 있어서인지 난 늘 비관적이었다.


 "내가 그랬어요. 이 사람 큰 작가 되면 어떡할 거냐고. 우리가 도와줄게요."


 '큰 작가'


 칙칙하고 채도 낮은 보라색 가슴팍에 황금색 세 글자가 찍혔다. 나의 바보 같고 고생스러운 모습을 본 사람들이 '잘 될 거예요'라는 식의 격려는 많이 했지만 당시에 들었던 '큰 작가'라는 말은 아직도 그때의 상황을 생생히 떠올리게 하고 괜한 눈물이 쭈륵 흐르게 한다. 선생님은 처음 보는 내게서 궁색함과 간절함이 풀풀 피어오르는 것을 아셨고, 멋쩍게 건넨 롤케이크를 굳이 사양하며 잘 챙겨 먹고 연락 주겠다며 나를 돌려보내셨다. 선생님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당시의 나와 같이, 막연하고 젊은 시절을 봤기 때문인지 내가 잘되리라는 확신을 주셨다.


<정처 없이> 종이에 연필과 과슈, 16 x 23 cm, 2023

"선생님, 기억나세요? 저 처음 그 복도에서 만나셨던 순간이요. 선생님, 그게 벌써 6년이 지났네요. 그때 제게 큰 작가 될 거라고 하셨고 전화 주셔서 자기 1번 작가라고 하셨던 것도요."


"어머, 그걸 다 기억해요?"


"그럼요."


 운명이나 인연이 정해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주 사소한 결심이나 정황이 비탈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나 사람들에 끈끈히 연결되면 '이건 결코 내 의지가 아니었음'을 깨닫고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내가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도 우연히 만난 한국작가가 '이렇게 서류를 이런곳에 내보아라'는 말에 간신히 기한에 맞추어 제출한 포트폴리오로 첫 전화통화를 하게되었고, 덕분에 사무실을 찾아가 인사드린 것이 시작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넘어지려 할 때마다 날 부축했다. 돌이켜보면 묘하게 그때마다 당신도 어려운 시기였고, 여력이 없었을 때인데도 내게 은근한 성냥불빛 같은 희망을 비춰주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전화통화한 선생님과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며 정중히 본심을 읊어나갔다. '선생님, 제가 또 쓰러지기 직전이에요', '태평양 건너 살고 있는 선생님과 저는 이제 어떻게 무엇을 하게 되는 건가요'라고 말했다. 당당하고 확신에 차 있던 그녀도 어느덧 지쳐있었고, '무엇도 확답을 줄 수없어 미안하다'라는 말로 녹록지 않은 상황을 전했다.


"괜찮아요, 선생님. 선생님, 저도 힘닿는 데까지 해보고 있을게요. 혹시 여건이 맞아서 전시하게 된다면 늘 보셨듯 열심히 해서 갈게요."


"너무 열심히 하지 말아요. 너무 힘들잖아. 몸도 다스리고, 편안히 하세요."


"그렇게 하면 작업이 별 볼 일 없어져서 다들 눈치채더라고요."


그렇게 통화를 마치고 편의점에서 복숭아티를 사다 마셨다. 선생님은 내 몸에 묶여있던 '큰 작가'라는 말을 풀어주는 것 같았고, 나도 아쉽긴 했지만 되려 홀가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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