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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돌이 아빠 Dec 09. 2023

무지개 메아리

<울:  ToGather>

<무지개 메아리> 나무, 아크릴 물감, 실, 비즈, 종이컵과 내장 스피커, 35 x 19.5 x 33 cm

 팽팽히 당겨진 실을 타고 아주 작은 목소리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온다. 귀를 바짝 붙인 종이컵에는 '아- 아' 또는 '들려?' 같은 당연한 말로 진짜 소리가 전달되는지 확인하는데, 막상 가까이 지내던 사람끼리 억지로 실이 당겨질 정도의 거리를 만들어서 굳이 비밀스레 전할 말은 별로없다. 조악한 종이컵 전화기는 그저 소리가 정말로 들려오는 상황에 웃음을 터뜨리는 용도가 전부인데, 그래도 내 말에 누군가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괜히 설렌다.


 아주 오래전 일인데, 너무 생생하게 기억에 남은 장면이 있다. 다 같이 모여 앉은 학생식당 긴 테이블에서 잘 지내오던 동기가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에 입이 바느질당한 듯 열리지 않았고, 주변의 폭소와 어색한 상황을 무마하려던 헛헛한 웃음을 구정물처럼 뒤집어쓴 것 같았다. '겉밝속축'의 인트로에도 가볍게 쓴 일인데, 되도록 좋은 말로 적당히 상황을 넘기려는 내가 얄미웠는지 그는 내 맘이 시커멓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럿 앞에서 터놓은 진심에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귀로 나오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당황했다. '꼭 그 말을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그런 말투로 해야 했을까?', '내가 뭘 그리 감추고 주변을 불편하게 했다고 그러나.' 와 같은 말이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한채 십여 년이 흘렀다. 내 배려나 잠행이 그리 조롱당할만한 것인지, 내가 사는 모습이 그리 아니꼬운 것인지 곱씹을수록 괴롭고 힘들었다.


 한창 눈칫밥을 먹던 군대 일병시절, 화장실에서 토를 쏟아낸 적이 있었다. 또래들이 만들어 준 삼시세끼 밥에 국과 반찬을 먹다 보니 인스턴트가 정말 절실했다. 그 화학조미료 맛과 플라스틱 포장지 냄새에 군침이 절로 돌았는데, 10시면 누워 진심으로 스륵 잠에 빠진 나를 선임이 흔들어 깨우며 냄비에 잔뜩 끓인 라면을 권했다. 모두가 잠든 사이 단 몇 사람이 모여 솥 한가득 김이 펄펄 오르는 라면을 보자 꿈을 꾸는 건지 헷갈렸는데, 신나게 먹어치우다 보니 문득 라면이 너무 많다고 느꼈다. '막내의 마지막 한 젓가락'이 한 세 봉지 정도 되어 보였는데, 맛있다는 말과 함께 꾸역꾸역 입으로 면을 밀어 넣어댔고 어느 순간 정말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급하게 뛰어간 화장실에서 술기운 하나 없이 변기를 부여잡고 코로 넘어오는 라면국물과 내용물을 뱉어냈다. 싫다고 표현할 수 없는 상황, 그리고 그저 감사해하는 내가 너무 싫었다.




 "아빠! 아빠, 거기 있어? 아빠, 내 목소리 들려?!"


 콩돌이는 꽈배기처럼 입구부터 출구가 한 바퀴 말려있는 무지개 미끄럼틀 통 안에 숨었고, 나는 못 찾는 시늉을 해대며 연신 어디 있냐는 말을 내질렀다. 아이들이 신나 하며 부모와 같이 노는 모습에 얼마나 많은 어른의 최선이 갈려 들어있는지 다시 한번 절감하며 허리를 접고 무릎을 부여잡은채 헐떡였다. 꽤 오래간 본인을 찾는 기색이 느껴지지 않아서인지 콩돌이는 더 고래고래 목청을 높이며 지금 자신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린다.


"못 찾겠어, 콩돌아. 이제 그만 나오면 안 돼?"


'정말 내 입으로는 말 못 하겠는데, 이 정도면 이제 그냥 알아주면 안 돼?'


 나는 무지개 미끄럼통 안에서 밖으로 몸이 나오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는 콩돌이처럼 내가 차마 내뱉을 수 없는 말들을 입안으로 쑤셔 넣고 그저 사람들이 눈치채주기를 평생 기다려왔다.




 그림이나 입체를 만들어 전시를 하는 사람치고는 손재주가 무딘 편인 내가 낯선 재료인 나무를 이래저래 깎고 이어 붙였다. 콩돌이가 뛰놀던 푹신한 놀이터 바닥, 놀이기구의 곡선과 구조를 어느 정도 흉내 내고, 알록달록한 색깔들을 안으로 숨기고 어두운 내부 공간을 뒤집어 바깥으로 드러냈다. 경쾌한 음악처럼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음표, 오선지, 만화의 효과처럼 대충 그려댔고, 구조의 내부에 스피커를 집어넣은 뒤 아주 작은 출력으로 무언가 내가 그간 전하지 못하던 의사를 재생했다. 숨겨진 스피커는 실로 연결한 뒤 밖으로 꺼내어 종이컵 전화기에 이어 붙였고, 굳이 그 말을 들으려는 사람은 잔뜩 허리를 숙이고 집중해야 말소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전시를 준비하던 어느 밤, 콩돌이를 재우고 스피커로 내보낼 '어두컴컴한 속내'를 녹음하려 했다. 하고픈 말은 이전에 대충 생각해 놓았는데, 내가 가장 하기 힘든 몇 마디 들이었다.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아요', '제발 그만하세요', '그것은 정말 싫습니다', '아니요, 그건 안 돼요' 정도였는데, 모두가 잠든 한밤 중에 한 번도 제대로 내뱉은 적 없는 표현을 스스로 소리내 말하고 고스라니 듣고있기 민망했다. 차마 연습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온몸에 닭살이 돋는 것 같았고, 결국 요즘 지겹도록 회자되는 AI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녹음은 일사천리로 끝났고,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작업된 사운드 파일을 스피커로 이식했다.

 



 갑자기 휘둘러대는 칼바람에 볼살이 에는 듯한 추위를 뚫고 내가 좋아하는 성실하고 다정한 친구가 전시장을 찾아 주었다. 만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고 그날이 기대되는 몇 안 되는 사람을 기다릴 때, 나는 더 조심한다. 괜히 오해살 말을 하지는 않을지, 느닷없이 대화가 사라져 어색해지지는 않을지, 너무 조심하다 보니 대화가 무거워져 지루해지지나 않을지. 온갖 걱정 끝에 다정한 두 사람이 만나서 격려와 칭찬, 겸양을 이어가다 보니 화기애애하게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한 사람이 말을 시작하면 다른 한 사람은 '그럼, 그렇고 말고'와 같은 추임새가 이어지는데, 단둘이 오붓히 서있던 전시장에 은근하게 울려 퍼지는 기계음이 대화의 틈에 끼어든다.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아요."

"제발 그만하세요, 그것은 정말 싫습니다."

"아니요, 그건 안 돼요."


방정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는 나와, 내가 자판으로 두들겨 기계의 목소리를 빌어 뱉어낸 속마음이 서로 자음 모음을 뜯어대며 싸우는 것 같아 얼굴이 부르르 떨렸다. 아, 내가 그간 잘하지 못했던 말은 괜히 못했던 게 아니구나. 나는 기가 막히게 속마음을 감추어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내게 칭찬을 건넸고, 친구가 떠난 빈 전시장에서 나무 구조물 안에 숨겨둔 스피커에 테이프를 덧대어 그 어색한 말소리가 더 작게 새어나오게끔 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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