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예능의 명과 암이 갈린 지점
<흑백요리사>가 장안의 화제다. 추석 당일 공개 이후 쟁쟁한 드라마와 예능을 제치고 국내 1위를 수성 중이고,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를 점령하고 있다. 백종원의 블라인드 시식 장면은 밈화되기 시작했고, 출연한 셰프들의 식당은 캐치 테이블에서 예약 매진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이쯤에서 <더 인플루언서>와 비교해보지 않을 수 없다. <더 인플루언서> 역시 약 한 달여 전 폭발적인 화제성을 기록하며 국내 뿐 아니라 아시아 6개국에서도 TOP 10 안에 들었다. 과즙세연과 방시혁 의장 이슈가 터지며 외부 논란의 수혜까지 입었고, 과즙세연과 이사배의 대결, 심으뜸 영상 등이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조회수 등 단순한 수치만으로는 알 수 없는 ‘화제성의 질적인 양상’ 역시 중요하다. 올해 최고의 프로그램을 꼽는다면 <흑백요리사>는 주저없이 들어 가지만, <더 인플루언서>에는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결정적인 차이가 뭘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프로그램은 출연자를 바라보는 제작진의 시선, 그들의 직업에 대한 제작진의 철학이 완전히 다르다. <흑백요리사>는 ‘맛’이라는 본질에 집중한 기획이라면, <더 인플루언서>는 ‘크리에이티브’라는 본질을 ‘어그로’로 잘못 덮어버린 기획이다. 출연자에 대한 섭외 부분, 프로그램 내 미션 구성에 대한 부분 등으로 나누어 자세하게 풀어본다.
맛을 잘 내는 출연자를 섭외한 <흑백요리사>,
어그로를 잘 끄는 출연자를 섭외한 <더 인플루언서>
<흑백요리사>의 가장 큰 상징성은 심사위원 백종원과 안성재다. 한쪽은 빽다방, 홍콩반점 등 대중적인 음식과 상업성을 상징한다면, 다른 한쪽은 국내 유일의 미슐랭 3스타의 예술성과 심미성을 대표한다. 보통 홀수의 심사위원을 섭외할 것 같은데, <흑백요리사>는 오히려 짝수 인원을, 그것도 심사 기준에서 충돌하리라 예상되는 백종원과 안성재를 섭외한다. 제작진은 이들을 통해 고급진 파인 다이닝과 손맛 좋은 동네 맛집, 그 중 무엇이 진짜 ‘맛’인지의 질문을 시청자에 던진다.
섭외의 진가는 2라운드에서 드러난다. 백수저와 흑수저가 처음 제대로 맞붙은 이 블라인드 시식 라운드에서, 백종원과 안성재는 각자의 심사평이 갈릴 때 치열한 언쟁을 통해 통과자를 선발해야한다. 백종원 유튜브에 의하면, 하나의 평가에 길게는 30분씩 걸리면서 서로 언성이 높아진 적도 있다고 하니, 이들의 토론은 각자의 영역에서 정점에 위치한 사람들이 꺼내놓는 요리 철학, 음식 철학의 대전쟁이었을 것이다.
백수저와 흑수저로 섭외한 셰프들도 동일한 핵심을 찌른다. 백수저는 유명 미슐랭 식당, 파인 다이닝 셰프거나 요리 서바이벌 우승자인데 반해 흑수저 대부분은 동네 맛집 사장이나 급식 영양사, 비전공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프로그램을 연출한 김학민 PD에 따르면, <흑백요리사>는 “우리 동네 밥집 사장님과 미슐랭 스타 셰프가 '맛'으로만 싸우면 누가 이길까”라는 궁금증에서 시작했다. 출신 성분에 상관없이 오로지 ‘맛’으로만 승부를 내겠다는 섭외 기획에서, ‘요리사’라는 직업에 대한 제작진의 철학이 여과없이 잘 드러난다.
https://news.nate.com/view/20240814n29059
반면 <더 인플루언서>의 섭외는 그래서 아쉽다. 인플루언서는 새로운 직업이고, 아직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유튜버와 스트리머 뿐 아니라, 틱톡커와 아프리카 BJ도 출연한다. 심지어 연예인인 장근석마저 ‘1세대 인플루언서’였을 것이라며 명함을 내민다. 여기까지만 보면 일견 인플루언서 필드에서 백수저와 흑수저를 고루 섭외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섭외에는 제작진이 ‘인플루언서’라는 직업을 바라보는 철학이 결여되어 있다. 혹은, 왜곡되어 있다.
인플루언서의 정의는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고, 크리에이터의 정의는 새로운 것을 기획해내는 사람이다. 둘이 동의어로 쓰이는 현 시점에서, <더 인플루언서>의 섭외 대상은 콘텐츠를 기획하고 출연하며 그것으로 팬들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으로 규정했어야 했다. 하지만 프로그램을 보면, 제작진은 인플루언서를 기획자보다는 어그로꾼으로 규정하고,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보다는 자극과 관심을 갈구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혹은 이 둘을 분리한 채 인지하지 않고 있다.
콘텐츠라고는 스스로의 벗은 몸 외에는 없는 ‘벗방’하는 아프리카 BJ들이나 룩북 모델 등이 섭외 대상에 포함된 점이 바로 이것을 방증한다. 어떤 각도에서 사진을 찍었을 때 가슴이 풍성하게 나올지를 연구하는 것이 과연 ‘콘텐츠 기획’이라고 불리울 수 있을까? 골프 유튜버가 골프 내용보다 저열한 정치질로 표를 얻거나, 사귀지도 않는 여친을 공개한다며 거짓말로 클릭을 얻어내는 사람을 ‘크리에이터’라고 정의해야할까? 만약 제작진이 실제로 그렇게 ‘인플루언서’를 정의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직업에 대한 철학의 부재를 깊게 드러낸다.
본질인 ‘맛’에 대한 미션을 구현한 <흑백요리사>,
‘크리에이티브’가 숫자에 가려진 미션의 <더 인플루언서>
<흑백요리사>에는 본질에 벗어난 미션이 없다. 소위 ‘인스타그래머블’한 미션, 시각적 화려함이 돋보여야 하는 미션 등은 전혀 없고, 오히려 블라인드 심사를 통해 맛 이외의 요소를 배제시킨다. 첫 라운드 ‘시그니처 디쉬’ 미션을 위해 제작진은 1000명 규모의 세트장을 짓고, 웬만한 식당보다도 나은 설비와 필요한 모든 재료를 제공했다. 불필요한 제한 장치를 없애고, 평가의 기준은 오로지 ‘맛’으로만 뒀다. 2라운드에서는 선입견을 배제하기 위해 심사위원들에게 안대를 씌운다. 검은 안대를 쓴 채 입을 벌려 받아먹는 심사원을 보고 있자면 웃음이 나오지만, 날카롭게 음식의 질감과 향을 지적하고 평가하는 그들을 보면 더이상 웃을 수가 없다. 모든 미션은 프로그램의 본질이자 기획의도인 ‘맛’의 구현에 집중되어 있다.
이 프로그램의 흥미로운 장치 중 하나는 층의 구분이다. 1라운드에서 백수저 20명은 2층에 자리한 채 1층에서 요리하는 흑수저들을 내려다본다. 흑과 백이라는 네이밍과 이를 반영한 셰프복의 컬러 차이, 그리고 이와 같은 세트 구성은 두 계급 간의 차이를 명시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장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프로그램의 제작진이 ‘흥미로운 구성’과 ‘본질에 충실한 미션’을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점이다. 엘리트 셰프와 동네 맛집 사장이 대결한다는 구성을 시각적으로 충실하게 구현하되, 대결의 본질인 ‘맛’을 저해하는 요소 (난해한 미션, 장비나 재료의 제한 등)는 제거하는 것이다.
역시나 <더 인플루언서>와 비교하게 된다. <더 인플루언서>는 출연자들이 숫자가 표현된 목걸이를 차고 나오는데, 이는 그들의 팔로워 수다. 첫 미션의 시작과 함께 팔로워 수는 3억 상금을 팔로워 수대로 나눈 금액으로 변환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플루언서의 가치’를 상징한다. 프로그램 도입부에 제작진은 인플루언서를 ‘존재감’과 ‘파급력’, ‘화제성’으로 정의한다. 하지만 이 세 단어는 동음이의어다. 또한 인플루언서들이 만드는 콘텐츠의 결과지, 직업의 본질이 아니다. <흑백요리사>가 요리사를 ‘돈 버는 사람’이 아닌 ‘맛 내는 사람’으로 정의할 때, <더 인플루언서>는 인플루언서를 ‘콘텐츠 만드는 사람’ 아닌 ‘조회수 만드는 사람’으로 규정했다.
사실, 이 프로그램에서 그래도 눈여겨볼 부분은 과즙세연과 이사배의 인사이트 토론이다. 클립으로 본 사람들은 이사배가 과즙세연 참교육하는 영상이라고 알고 있겠지만, 내가 집중해서 본 건 이사배의 콘텐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었다. 상대방의 영상 썸네일을 보고 시청자 데모그래픽을 맞혀야 하는 이 미션이야말로 콘텐츠 기획자로서 크리에이터, 인플루언서의 전문성과 업의 본질을 드러낸다. 실제로 이사배는 8년차 업계 탑으로서, 무엇보다 유튜브 생태계와 시청자에 대한 연구를 쉬지 않은 전문가의 입장에서 과즙세연 본인보다도 그녀의 영상을 더 정확하게 분석했다. 다른 미션들도 이런 기획의도로 구성되었다면 이사배 같은 크리에이터들이 더 많이 살아남았을 것이고, 프로그램 방향성도 완전 바뀌었을 것이다.
<더 인플루언서>가 인플루언서 직업의 본질을 ‘어그로력’이 아닌 ‘기획력’으로 바라봤다면 어땠을까? 존재감과 파급력, 화제성 대신, 기획력과 아이디어, 로열티로 프로그램의 포문을 열였다면? 다수 대중과 끊임없이 호흡하며 소통하고, 그들의 높아져가는 눈높이를 만족시키기 위해 편집과 촬영, 기획과 디자인, 마케팅과 홍보까지 다 해내는 올라운더로서의 크리에이터를 보여줄 수 있는 미션을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팔로워 수가 적힌 목걸이 대신, 그들이 창출해낸 트렌드와 공감력, 친밀함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흑백요리사>와 <더 인플루언서>는 모두 흥행한 프로그램이다. 각각 긍정 바이럴과 부정 바이럴의 대표적인 예시라고도 볼 수 있을 만큼, 둘의 양적 지표는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프로그램을 바라보는 시청자의 시선은 극명하게 갈린다. 나는 개인적으로 제작진이 출연자에 보내는 시선을, 시청자도 고스란히 느낀다고 생각한다. <환승연애>와 <나는 솔로>만 하더라도 과몰입의 시선과 빌런 색출의 시선이 극명하게 차이나지 않는가.
드라마와 영화 같은 대본이 있는 콘텐츠와 달리, 리얼리티로서 예능은 현대 사회의 특정 현상을 다루며 그것에 대한 해석이 연출자의 시선으로 반영할 때 반향을 일으킨다. <흑백요리사>에는 요리사와 그 업에 대한 제작진의 깊은 고민과 철학이 느껴진다면, <더 인플루언서>에는 반대로 인플루언서에 대한 빈곤한 이해와 소위 ‘어그로’가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