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4학년이 되어서야 깨달은 사실
여름방학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모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늘어져 있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나는 워라밸이라는 것에서 ‘워크’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사람이라 바쁜 것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내심 이런 날을 기대했다. 그냥 아무 계획도 없는 날.
그 날은 비가 많이 왔다. 빗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몸이 피곤하다고 비명을 질러서 그 소리에 묻혔는지 알람 소리를 듣지 못했다. (어쩜 쉬는 날에까지 일찍 일어나려고 했는지) 느지막히 10시 즈음에 일어나 부엌을 어슬렁거렸다. 오르간 연습을 하겠다며 집을 나서는 엄마와 스위치하듯 식탁을 점령했다. ‘아 뭐 먹지?’ 집에서 만들어 먹고 싶은 음식이 많았던 것 같은데… 딱히 생각나지 않아 결국 양배추를 잘게 썰어 달걀과 볶은 뒤, 라이스페이퍼에 싸서 먹었다. 라이스페이퍼가 뜨거운 양배추의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옆구리를 터뜨렸다.
싹싹 설거지까지 완료하고는 소파에 앉았다. 아 뭐하지… 모처럼의 휴일을 그냥 보내고 싶지는 않아서 피아노를 조금 쳤다. 흠, 왜 이렇게 못 치지? 금방 질려버려서는 닌텐도도 깔짝여보고 애니메이션도 잠깐 봤다가 라면이 먹고싶어져 애매한 시간에 라면을 끓여먹었다. 대체 남들은 이런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거지? 애매한 권태감을 계속 느끼다 제 풀에 지쳐서 결국 낮잠에 빠져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것은 8시경이었다. 이제는 정말 뭘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의미없이 남들이 올려둔 사진들을 넘기며 시간을 보내다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스물 셋이 되도록 왜 취미가 없을까? 누군가는 나의 일과를 듣고 ‘알차게 휴일을 보냈다’고 말했다. 그런가? 별로 재미있어서 한 것들은 아닌데. 답답한 마음이 들어서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어느새 어둑해져 공기중에 비 냄새만을 남기고 있었다.
달리면서는 속도에 몰아붙여져서 생각이 둔해졌다. 차라리 숨을 헐떡이며 사고가 마비되는 것이 가장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내 일상도 그런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루하루의 일과에 몰아붙여져도 ‘뭔가 하고 있는 상태’가 나의 스탠포인트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사실 그냥 ‘뛰는 중’이라는 느낌에 도취되어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계획이 없는 날, 나는 이상한 불안감에 시달리며 찌부둥함과 권태감 사이에서 부유했다.
얼마 전 친구 H와 함께 ‘주체적 취미’에 대해 대화했다. 문득 어떤 방식을 취해도 자신이 힐링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H에게 나는 능동적인 취미를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OTT 플랫폼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침대에서 늘어지는 수동적인 취미가 아니라 무언가 만들고, 완성하고, 적극적으로 향유하는 그런 취미들을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떠냐고.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오늘, 결국 나는 나 자신에게 묻게 되었다. 너는 그런 취미가 있냐고.
나의 취미는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다. 피아노 치기도 좋아하고, 달리기도 좋아하고, 글쓰기도 좋아한다. 하지만 취미로 시작한 많은 것들이 결국 나의 완벽주의 성향을 이기지 못하고 취미의 자리를 떠났다. 친다면 잘 쳐야 했고, 달린다면 멈추면 안됐고, 쓴다면 작가다워야 했다. 태스크에서 나를 이끌어 주는 가치 중 하나인 ‘승부욕’과 ‘완성도에 대한 집착’은 역설적으로 나를 ‘취미없음’ 인간으로 만들었다. 나에게는 그것이 재미로 시작한 일이라고 할 지라도 그 모든 것들을 태스크로 만들어버리는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하반기 목표에 ‘완벽주의 탈피하기’를 추가했다. 수잔 애쉬포드의 책 <유연함의 힘>을 읽으면서 시도하는 나 자신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지기로 한 것. 실은 취미란 그 휴식의 가치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에게 좋은 취미가 찾아와줄 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도와주는 취미가 생기면 좋겠다고 작게 소망했다. 분명 그렇게 숨가쁜 일상을 즐길 수 있는 체력을 기르는 것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