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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석 Apr 09. 2024

기구한 운명을 담은, 蘇東坡笠屐圖의 流轉

 중봉당(中峰堂) 혜호(慧皓)는 조선 말기 선승이자 화승으로 주로 경기, 강원지역에서 활동한 승려다. 평소 오른손을 늘 싸매고 생활하다 불화를 그릴 때만 풀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혜호의 소동파입극도(蘇東坡笠屐圖) 에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혜호의 소동파입극도 에는 ‘소문충공입극상(蘇文忠公笠屐像)’이라는 화제(畫題)와 함께 봉은사(奉恩寺)의 혜호가 모사했음이 묵서로 남아있다. 그림 위쪽에는 구한말 비운의 선비 과암(果巖) 홍진유(洪晉裕, 1853~1884 이후)가 추사체(秋史體) 행서(行書)로 쓴 발문 있고 오른쪽 아래에는 풍운아 고우 김옥균이 건암 권숙에게 이 그림을 주었다는 글도 있다. 그림 양옆 쪽에는 이가원 교수가 1981년 지은 발문이 있다.

 소동파입극도는 소식이 담주 유배 때 농부에게 빌린 삿갓 쓰고 나막신 신고 빗속에 물웅덩이를 건너다가 동네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됐다는 고사를 그린 그림이다. 소식은 왕안석(王安石)의 신법당(新法黨)의 급격한 개혁 정책에 시종 맞서다 좌천과 유배를 거듭하며 마지막 해남도(하이난섬)에서 유배가 풀려 귀향 도중 병사했다. 


소동파는 북송의 대문장가였지만 정치적으로는 불운했다. 혜호의 소동파입극도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그림의 주인공 소식 못지않게 기구한 운명을 맞이한 이들이 많다. 이 그림 발문을 쓴 홍진유가 그렇고 그림을 서로 주고받은 김옥균과 권숙도 그렇다. 이들 모두 구한말 갑신정변과 의병전쟁 소용돌이 속에서 목숨을 잃은 인물들이다. 


 이가원 교수가 쓴 그림 속 또 다른 발문에서 이 그림의 유전(流轉) 과정이 쓰여있다. 마지막 소장자 노촌 이구영의 기구한 사연은 유인석, 이강년 등 제천의병전쟁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남북 분단의 현대사 등 우리나라의 비극적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발문을 쓴 홍진유는 1886년(고종 23) 갑신정변의 혈당(血黨)으로 몰려 사도(蛇島)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석방되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죽었다. 아래는 홍진유에 대한 승정원일기 기사다. 


○ 또 의금사의 말로 아뢰기를,


“정배 되어 석방되지 못하고 죽은 죄인 홍진유(洪晉游)의 직첩을 돌려주도록 명을 내리셨습니다. 홍진유의 죄명을 즉시 말소하고 직첩을 돌려주는 것을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또 다른 발문은 이가원 교수가 절친한 벗 노촌 이구영의 부탁으로 지은 글이다. 이 발문 내용에는 김옥균이 이 그림을 금강 비구에게서 얻어 권숙에게 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권숙은 과거 급제자로 단양 군수 재직 때 유인석이 이끌던 제천의병에 포로로 잡혀 유인석의 종사관에 의해 처형당한 인물이다. 이구영이 해방 후 김구를 찾아갔을 때 김구는 구한말 황해도에서 이구영의 집안 출신 종사관을 한번 만났다고 회고했다 한다. 


 권숙을 처형한 유인석의 종사관은 노촌 이구영 집안이다. 아마 단양 군수 권숙이 의병에게 잡혀 처형되면서 그의 재산이 적몰 되는 과정에서 이 그림도 이구영 가계에서 소장하게 된 것 같다. 이 사건으로 서로 원수 집안이 된 이 씨 가문과 권 씨 가문은 현재는 서로 화해했다고 한다.  아래는 권숙에 대한 승정원일기 기사다. 


고종 33년 병신(1896, 개국) 1월 15일(경술, 양력 2월 27일 3) 맑음.


 ○ 충주 관찰사(忠州觀察使) 김규식(金奎軾), 청풍 군수(淸風郡守) 서상기(徐相耆), 단양 군수(丹陽郡守) 권숙(權潚)이 난민(亂民)의 소요가 일어났을 때 해를 입었다.


 남북 분단의 비극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야기는 마지막 이 그림의 소장자였던 노촌(老村) 이구영(李九榮, 1920년~2006년)이다. 이구영은 충북 제천의 만석꾼이자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 이주승과 작은아버지 이조승은 구한말 의병활동에 참여해 의병장들인 이강년과 유인석의 비서를 각각 지낸 전력이 있다. 이구영은 벽초 홍명희, 위당 정인보 선생의 제자였으며, 일제 당시인 1943년 독서회 사건으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50년 월북해 1958년 7월 부산에서 남파 간첩으로 내려왔다가 접선에 실패하여 9월에 체포됐다. 부산역 앞에서 그를 체포한 경찰은 일제 강점기에 그를 고문했던 형사였다. 남쪽 감옥에서는 22년 동안 장기수로 수감생활을 하다 1980년 석방됐다. 대전 형무소 감방 동기 신영복, 심지연 등에게 한학과 서예를 가르쳤다. 출소 후에는 이문학회를 창립, 후진에게 한학을 가르쳤다. 

이문학회의 이문회우 以文會友는 학문으로써 벗을 모은다는 뜻으로, 논어에 유래하는 말이다. 집안에 전해온 고문서와 의병 독립운동 자료 등 6,000여 점을 제천 의병 도서관에 기증했다. 남과 북에 각각 1남 2녀, 1남 1녀를 두었다. 이구영 선생이야말로 남북 분단의 비극을 고스란히 담은 인생이 아닌가 생각된다. 


 소동파입극도(蘇東坡笠屐圖)의 주인공 소식의 일생도 불우했지만 혜호가 임모 한 소동파입극도에 관련된 홍유진, 김옥균, 권숙, 이구영 등 인물들의 삶도 비극적이다. 갑신정변, 을미의병전쟁, 한국전쟁 등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의 아픔을 품고 있는 그림이다. 


 유전(流轉)의 사전적 의미가 “이리저리 떠돎”이다. 구한말 국권 침탈기 금강 비구에서 김옥균, 권숙, 이원재(이구영 할아버지)로 이어지며 마지막에는 노촌 이구영이 소장했던 이 그림은 현재 국립중앙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기구한 비극을 담음 혜호의 소동파입극도의 유전(流轉)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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