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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Mar 31. 2024

영화 ‘졸업’ 리뷰

피학 너머

종종 우리는 무슨 모순, 어떤 오류를 이미 감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감상에 의해 그 주장을 관철하고자 한다. 우리는 주장이 진행되기도 전에 은연중에라도 저 모순들을 이미 알고 있었을 모양이지만, 그럼에도 일단 침묵하며 원하는 결론을 끌어내기 바쁘다.

가령, ‘비판적 인간’ 자체가 가질 수밖에 없는 오류를 비판하겠다는 ‘비판적 인간’은, 이미 그 웃긴 오류에 갇혀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전제가 그 결론을 부정하는 까닭에, 비로소 그는 결론이 맞으면 전제가 틀렸으며 전제가 맞으면 결론이 틀린 무조건적인 패배에 도달한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논증이 ‘다른 게 아니라 틀렸다’는 특별한 엄밀성으로 인류에 공헌하게 되는 것이다.

주장의 근거를 만들어내야 하는 과정을 성급히 마무리하여 재빨리 결론을 관철하고자 하는 저 관성은, 예의 주장의 관철에 혈안이 된 다양한 감상들을 분비하지 않던가. 무슨 감상이 우리를 이토록 특별한 엄밀성으로 황망하게 몰아세우곤 하던가. 이 응석은 언젠가 뿌리 깊은 원한으로 밝혀지곤 하지 않았던가. 언제 우리는 무슨 학대의 기억을 떠돌며 거기 ‘상상’ 속 가상의 가해자에게 다시 가해로 보복하려고, 과연 현실의 누구를 그 대리 과녁 삼고 있었나.

학대받는 인간. 언젠가 어느 시절 학대의 기억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은 늘상 세계를 이분하고 있을 양이다. 승리(가학)와 패배(피학) 속에서, 설령 지금 그가 승리에 속해 있다손 치더라도, 그는 어느 미래의 미증유의 패배를 가설로라도 지금으로 가져와 그 헛된 예견 속에 붙박여 그토록 미리 대비하고 대응하고 있지 않나. 이는, 실로 근본적인 정동인 ‘불안’과는 아주 다른 종류의 ‘피학’이며, 그는 인물 아닌 사물까지도 오직 이 학대라는 관계 양상 속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으리라.

비로소 여기 이 ‘승리’와 ‘패배’는 투사projection의 두 양상, 유년 시절 겪곤 하는 소위 ‘기획된 투사’의 두 종류일 모양인데. 그는 승(가학)자에게 우월성의 정동을 분배하고, 패(피학)자에게 열등성의 정동을 분배하곤 할 양이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승자가 되고 싶은 ‘패자’에 ‘영원히’ 머물러 있다. 그가 승자로 간주하는 어느 인물에게 애착을 보이는 건 학대라는 강제된 관계 양상의 반복에 불과하며, 따라서 패자로 간주된 인물에게 보이는 애착은 자기 연민의 확장된 버전일 뿐 아니겠나.

그는 착취하고 학대하는 가학자에게 애착을 느낄지언정 이를 스스로 ‘진정한 사랑’으로 정의하지는 못하는데, 거기 반복하여 재생되는 학대의 양상 속 자기 모습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까닭이다. 그는 착취당하고 학대당하는 자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자기 자신을 찾아야 한다. 달리 착취당하고 학대당하는 혹자, 혹은 현재 당하고 있지는 않더라도 당할지도 모를 혹자를 찾아서 ‘구원’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언젠가의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구원 대상자로서 ‘피학자’를 모집한다. 그는 이를 스스로 ‘진정한 사랑’으로 정의할지도 모르겠다. 거기 비로소 재생되는 건, 자기 모습을 한 다른 사람을 재차 구원하는 자기 자신, 다른 모습으로 재생된 믿을 만한 가학자로서의, 예의 가학자와 동일시에 성공한 자기 모습이므로.

여기 달리 간주된 자기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과연 피학과 가학에서 한 치라도 벗어났던가? 그가 원한 모습이 가학의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남용하지 않는 ‘평판(이미지)’을 가진 상태를 말함이라면, 그처럼 ‘굳이’ 예비 승리의 상태 속에서 피학자를 ‘어른스럽게’ 다루(학대하)는 걸 의미한다면, 그리하여 이 피학자야말로 그가 힘을 가진 학대자임에도 관용을 가졌다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면 그는 여전히 동일한 원망과 과거를 맴돌고 있는 게 아니던가.



그리 소환된 학대는 사랑과 범죄 사이를 오가는 도박을 유발한다. 피학자는 자기 마음을 맞춰 보라고 문제를 내고, 단서 없이도 뚫고 들어오는 진정한 가학자(보호자)의 부활을, 언젠가 어느 시절 가학자의 재림을 기다린다. 한편, 가학자는 어림짐작한 확신 위에서 피학자가 제아무리 아니라고 말하더라도 스스로 지레짐작한 피학자의 마음을 전제로 한 행동(유사 범죄)을 이어간다. 이 도박에 따르는 범죄의 위험성은, 피학자에겐 사랑의 크기를 증거하는 동시에 가학자에겐 세계를 예측하는 유사 통제 능력의 만끽과 상대에게 이입하여 역으로 가정된 자기 사랑의 크기에 대한 낭만적인 만족감을 불러온다.

오직 피학자와 가학자뿐인 이 학대의 역할극은, 상황에 따라 서로 간의 배역을 뒤바꾸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쥐고 흔들거나 흔들리며 의존하려는 학대의 이 두 배역 양상 외의 관계를 영영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엔 소통이 아니라 승패의 기싸움 외에 무엇도 없다. 소위 이야기하는 기싸움이란 무엇인가? 누가 아이의 역할을 하여 상대에게 부모의 역할을, 그리하여 유사 부모의 책임에 비롯한 죄책감을 뒤집어씌울 것인가 하는 경쟁 아니던가 말이다.

그는 학대받은 기억 속에서 가학자를 승자로서 추억한다. 승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고자 애쓰는 그 어마어마한 욕망이 그 자신이 영원히 패자라는 걸 증명하고 있다. 그처럼 완전한 승자에 대한 신화는 그 자신의 영원한 패배와 관련 있지 않던가. 가학성은 오롯이 자기 자신이 자의적으로라도 얼마나 학대받았는지만 증명하고 있을 양인데. 그리 보면 차라리 동일한 동전의 뒷면인 피학성이 조금이라도 더 진실을 직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여기 이 동전의 양쪽 면모 어디에도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는 덕택이다.

가령, 그 어떤 반항도 그 출발은 자신을 학대했던 누군가에 대한 동일시에 불과하지 않나. 말하자면, 학대했던 가학자를 다시 학대하고자 시도하는, 자기 의견을 꺾던 그들의 의견을 다시 꺾고자 보복을 시도하는, 그리하여 학대의 최종 심급으로 ‘신’을 가정하건 ‘왕’을 가정하건, 혹은 ‘가부장’을 가정하건, 어떤 제도 하에서도 이 일의적인 질서를, 완전성이 부여된 지도자(리더십/카리스마)를 가정하고 거기 동일시하는 건 학대받은 패배의 영원한 보복이 가지는 이분법적인 시도의 일의적이고 단순한 관점을 증거하고 있지 않던가.

그리하여 설령 그가 보복에의 ‘허망함’을 알고 있다고 짐짓 어른스럽게 주장하더라도, 우리네 현실의 감정이 이성과 뒤섞여 작용하는 걸 부정하여 이성과 별도로 이 가면 쓴 보복의 감정이 무조건적으로만 존중받길 원하는 동시에 모든 감정이 순수하다는 전제를 논한다는 점에서 그는 결코 보복하는 자기 원망을 인정하지 못할 뿐 아니라 바로 그 보복의 허망함을 알지도 못하고 또 아직은 알 수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분법을 벗어나는 건 원망하며 선망하는 동일시와 그저 이 동일시에서 비롯된 ‘기획된 투사’를 극복해 지나쳐야 마침내 가능할 양이리라.


저와 같은 ‘기획된 투사’는 어떤 패턴의 상상에 기반해 있다. 그리고 무슨 상상이 끝끝내 추론이 되지 못한 그저 망상으로 판명 났다손 치더라도, 누군가 자기 망상을 기반으로 행동한다면 그 행동의 기반이 된 망상은 아니더라도 당 행동 자체는 현실에 포함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망상은 현실이 아니지만 그러한 망상에 기반한 행동은 현실을 구성한다. 그와 같이, 우리가 단위 정확성을 추론할 적에 현실의 기반이 되는 게 때때로 어떤 망상일 적도 있다는 것을 언제나 고려해야 할 텐데.

학대를 기반한 피학적이거나 가학적인 관점을 관찰할 적 또한 마찬가지리라. 실로 그가 승패를 기반한 기싸움만을 전제로 삶을 이분하여 바라보더라도, 그처럼 그의 관점이 종종 현실과 그저 다른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아예 현실과 동떨어져 ‘틀렸더라도’ 우리가 그의 행동의 원인을 추론하기 위해선 그가 틀렸을지언정 기반하고 있는 바로 그 ‘관점’을 가정해야만 한다.

본질이 없다는 건, 그저 본질이 다양한 까닭에 일의적이어야만 본질로 정의될 수 있는 사전적 개념이 이제 파괴되었다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허망한 본질이라도 가정하는 혹자의 행동 양태를 분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시하기까지 한다. 우리가 학대의 역할극을 뛰어넘을 적에, 오롯이 세계가 승패(우위의 여부)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될 적에, 그리하여 끝끝내 개별 정확성(필연성)에 도달하고자 노력하게 될 적에조차 우리는 어떤 불가능성에 직면하게 될 양이다. 우리가 제아무리 ‘본질’이 없다는 진실을 말하고 있을 때조차 실상은 ‘본질이 없다’는 본질을 가정하고 지껄이는 셈이므로. 그러나, 언제나 저 무수한 시행착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늘상 지시하고 있다.

예컨대 유아는 자기 응석을 온전하고 완벽하게 알아먹지 못하는 보호자(대상)로 인해, 언젠가 어느 순간 얼마간은 어쨌거나 스스로 ‘학대’당하고 있다고 간주하는 시간을 거칠 수밖에 없고, 이 학대의 역할극으로 되돌아가 자랑스러운 승(가학/보호)자에 동일시하며 삶 전부를 소비하고자 하는 건 어느 단계에선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단계적 한계 아니던가. 과연 누가 공간을 접어 달리듯 단계를 접어 발달할 수 있단 말인가. 허나 소위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우리 인식이 도달하는 일 또한 가히 초현실적이라 아니할 수 없지 않나.

이 ‘단위 정확성(있는 그대로의 개별 현실)’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학대’에 고착된 환상을 뛰어넘은 후에도 저로부터 비롯된 신념 기제뿐만 아니라 무수한 여타의 허수아비 신념들을 지나쳐야 하지 않던가. 그럼에도 우리는 결코 도달했는지 확신할 수 없고, 실은 완전히 도달할 수는 영영 없을 터다. 언제나 부족한 그 길 위에서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노력’해야만 할 양이다.

그럼에도 타협할 수는 없다. 어떤 의심도 없는 자의적 최면으로 마음이 양껏 편안할 수 있는 ‘(기획된 투사로서의)본질’을 황망히 연이어 가정하는 타협을 우리 삶에 들인다면 삶이 얼마나 평탄해지겠는지 예상하는 바에도, 이미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이미 우리는 은연중에 그것이 ‘정확함’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그리하여 언젠가 그리 외면한 무의식적 ‘앎’이 억눌리고 곪아 어떤 지독한 ‘증상’으로 도래할지 무의식중에라도 알 수 있는 까닭이리라. 우리는 늘 ‘현실’을 추리해야 한다. 이는 여느 이웃의 관점(이를테면 망상)에 대한 추리조차 포함한다.

혹자가 이야기했듯, 합리성과 상상이 상관없다고 가정하는 건 논하기 편하고자 타협적이고 임의적으로만 현실의 현상들을 설정했을 적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삶이라는 ‘현실’은 이성과 감정이 오로지 뒤섞여 돌아가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건 그저 단위 정확성이며, 현실은 합리성(객관)과 상상(주관)이 뒤섞이고 이성과 감정이 뒤섞여 있는 채로 인식해야 할 만큼 ‘충분히’ 추상적인 까닭에, 다른 혹자가 이야기했듯 우리네 그 무슨 관점이나 이론도 ‘충분히’ 추상적이고자 해야 무슨 이론이든 이론으로서의 그 최소한의 실효성을 담보할 수 있을 만치 ‘경험적’일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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